#미국 방문과 6·25 전쟁 발발 그리고 안익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시작되자 당시 안익태가 머물고 있던 파리는 전쟁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2차 세계대전 동안 형식적으로 중립국을 표방했던 스페인으로 피난을 간다. 안익태 역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일주일쯤 지난 6월 12일, 스페인으로 입국을 한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안익태는 미국에서 끊임없이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며 ‘음악외교관’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했다.
당시 세계는 전쟁과 함께 격동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드디어 광복을 맞는다. 안익태는 광복을 맞은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르셀로나 미국 영사관에 비자를 신청한다. 미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 여권을 갖고 있던 안익태에게 비자 발급은 쉽지 않았다. 일본이 패전국이었으며 스페인과 일본이 외교관계를 단절한 상태에서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비자 발급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당시 안익태에게 비자 발급은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그러던 중 1950년 3월 7일 안익태는 처음으로 한국 정부가 발급한 여권을 받게 된다. 이후 안익태는 드디어 한국 여권으로 미국 비자를 발급 받고 미국 방문을 하게 된다. 1937년 유학생 안익태가 ‘세계적인 지휘자’라는 부푼 꿈을 안고 미국에서 유럽으로 향한 지 13년 만에 미국 땅을 다시 밟게 된 것이다.
1950년 6월 27일. 안익태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뉴욕행 아틀란틱호에 몸을 싣는다. 배를 탄 지 이틀 후 안익태는 신문을 보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나흘 전인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신문을 보는데 온통 한국 이야기뿐이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은 아주아주 안 좋은 상황인 것 같아. 그렇지만 두고 봐야지. 오늘 선장이 말하는데 언제든지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귀국 편에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하는군.”
안익태는 당시 스페인에 있던 부인 롤리타 안에게 편지 한 장을 쓴다. 한국전의 상황이 심각해졌다는 것을 느끼고 부인과 어린 딸에 대한 걱정이 앞선 것이다. 안익태가 미국으로 떠날 당시 큰딸 엘레나는 겨우 3살이었다.
당시 쓴 편지에는 안익태의 자상하고 가정적인 면도 엿볼 수 있다. 안익태는 “아기는 잘 지내나? 항상 나를 찾겠지? 장난감하고 옷을 잔뜩 갖고 최대한 빨리 돌아갈 거라고 말해줘.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스타킹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오. 내일 모레면 7월 5일이네. 우리 결혼기념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리다. 내가 돌아가면 우리 함께 멋진 잔치를 가집시다”라고 편지에 적는다.
#미국에서의 새로운 꿈과 좌절
“미국에서 많은 연주 기회가 있게 된다면 당신과 아기도 미국으로 오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하오. 내일이면 뉴욕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나는 매우 바빠질 거야. 그리고 분명한 것은 나의 새로운 삶이 나타나겠지, 새로운 길이.”
1950년 7월 4일. 안익태는 배 위에서 부인 롤리타 안에게 또 다시 편지 한 통을 쓴다. 이미 유럽에서 성공적인 지휘자로 상당한 명성을 떨쳤기에 미국 무대에서도 명성을 떨치길 기대했던 셈이다. 한편으로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위기의 상황에서 미국을 돌며 연주를 하고, 한국 상황을 알려야겠다는 결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안익태는 스페인 마요르카 섬에 거주하고 있었다. 1946년 7월 롤리타 안 여사와 결혼한 이후 그해 가을에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 제안을 받고 마요르카 섬에 정착해 살게 된 것이다. 이후 안익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창단과 정기연주회를 위해 매우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작은 체구이지만 열정이 넘쳤던 한국의 지휘자 안익태.
하지만 안익태에게 마요르카 생활은 항상 뭔가 갈증을 주었다고 한다. 마요르카 교향악단이 자신의 지휘 아래 많은 성장을 했지만 여전히 성에는 차지 않았던 셈이다. 허영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음악사 전공)는 “이미 유럽 무대에서 세계적인 교향악단을 이끌고 지휘한 안익태 선생 입장에서는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실력은 뭔가 아쉬웠을 것이다. 안익태 선생의 음악적 욕심이 대단하지 않느냐. 아마도 먼 미래를 봤을 때 미국에서의 정착 가능성을 생각했다고 볼 수도 있다”라고 전했다.
1950년 7월 5일 안익태는 드디어 미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안익태는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실망감을 표현한다. 당시 안익태가 부인 롤리타 안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러한 내용이 적혀있다. “불쌍한 엘레나(큰딸),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겠다고 말해주오. 뉴욕의 이런 XXX 삶을(스페인어와 영어가 뒤섞여 해석이 불가능)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거든”이라고 밝힌다.
허영한 교수는 논문을 통해 “(안익태 선생이 실망했을)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아기와 혼자 남아있는 자기 부인에게 미안한 마음에 빨리 돌아가겠다고 했거나 아니면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접촉했던 사람들로부터 반응이 신통치 않았을 가능성이다. 지금으로서는 확실치 않지만 첫 미국 방문은 안익태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라며 “안익태 선생의 급한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에 오기까지도 힘이 들었지만 막상 오고 나서도 험난한 길이 예고된 셈이다. 좌절한 안익태는 미국으로 온 지 3주 만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미국에서 ‘음악 외교관’으로 서기까지
피아니스트 헤럴드 콘과 함께.
한국전쟁 후에 한국에 다각적으로 지원을 한 미국은 민간 차원의 지원을 위해 1952년 ‘한미재단’을 설립했다. 안익태의 미국 활동은 바로 이 한미재단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미재단은 안익태를 적극 후원한 것으로 전해진다.
1953년 12월 31일. 안익태는 신시내티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자신의 작품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며 드디어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다. 또 1월 28일에는 ‘서울-인디애나폴리스 교환 연주회’에 지휘자로 나선다. 당시 교환 연주회는 두 도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고 한국전쟁 당시 함께 싸운 동맹의 친선을 도모하는 목적을 지녔다고 한다. 당시 연주회 인터미션 시간에 교향악단 단장과 인디애나폴리스 시장, 한국 대사가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네 명의 한국전 참전용사들이 무대 위로 올라온 것으로 전해진다.
1950년대 초의 안익태. 미국 신시내티교향악단을 지휘하고 중남미로 떠나던 당시의 모습이다.
안익태는 이후에도 1957년부터 미국 순회 연주를 떠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계속해 나간다. 그 첫 스타트로 1957년 11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찰스턴 교향악단을 지휘했는데, 현지 일간지 <찰스턴데일리메일>은 안익태의 지휘를 본 교향악단의 연주단원인 릴리안 캐럴의 ‘리허설 참관기’를 게재한다.
캐럴은 안익태의 열정적인 지휘 모습을 묘사한 후에 “리허설이 끝나자 우리들 중 몇몇은 눈물을 흘렸고 나는 마지막 마디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국가에 압도당했다. 연주자들은 악기로 두들기며 환호했고 어떤 이는 ‘브라보’를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달려갔고 그를 껴안았다. 우리는 황홀한 흥분 속에 있었다. 바로 이것이 한국에서 온 이 작은 남자의 위력이었다”고 밝혔다.
이렇듯 안익태의 미국 순회 연주는 성공적이었다. 앨라바마,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캘리포니아, 하와이 등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미국 전역에서 지휘했다. 안익태의 미국 순회 연주는 1958년까지 계속된다.
#안익태의 못 다 이룬 꿈
한국전쟁의 여파로 한국이 큰 위기를 겪는 상황에서 해외 원조는 필수적이었다. 허영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한국의 핵심 지원국인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 일이 그만큼 중요했고 그 역할을 안익태가 훌륭히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한국은 안익태가 필요했고 안익태 역시 한국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던 셈이다. 허 교수는 안익태가 소위 ‘한국의 음악 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순회공연 후 한국에서의 활동을 원했던 안익태의 꿈은 이후 좌절되는 모습을 보인다.
“나의 진정한 꿈은 한국에서 국립 오케스트라를 창립하는 것이오.”
1958년 3월 29일. 안익태는 초기 한인 이민자의 중심지였던 하와이 호놀룰루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한 언론과 인터뷰를 갖는다. 안익태는 이 자리에서 ‘한국의 교향적 환상곡’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 계획도 발표한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활동은 물론, 국립 오케스트라 창립과 영화 제작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정작 조국에서 제대로 된 환대를 받지 못한 셈이다.
허영한 교수는 “당시 국내 음악계와 안익태 선생 사이에서는 상당한 마찰이 있었다. 일단 안익태 선생을 시기하는 모습도 일부 있었고 무엇보다 국립 오케스트라가 안익태 선생 주도로 창단될 시 혹시 밥그릇을 뺏길까봐 두려워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그렇다고 안익태 선생이 타협적인 인물이면 모르겠지만 워낙 고집이 세서 국내 음악계와 타협이 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라고 전했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던 시절 미국에서 ‘한국의 작곡가’로 소개되며 끈질기게 한국환상곡을 지휘하던 ‘음악 외교관’ 안익태의 꿈은 그렇게 안타깝게 좌절된 셈이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