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년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까지도 고운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이혜숙.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린 시절엔 어른들이 ‘참 예쁘게 생겼다’며 손에 사탕을 쥐어 주고, 소녀 시절엔 ‘인형같이 생겼다’는 주변의 칭찬과 부러움을 받았던 그녀. 예쁜 외모 덕분에 배우가 되었지만 정작 그 미모 때문에 한동안 연기에 회의를 느끼기도 했던 한 여배우가 있다. 이혜숙. 아직도 어린 친구들에겐 ‘예쁘장한 탤런트 아줌마’로 불리는 그녀다.
이혜숙을 화면 속에서만 보아오던 기자 역시 그녀의 외모로 인한 편견이 없지 않았다. A4지 두 장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많은 질문을 준비해 갔던 것은, 행여 그녀가 기자와의 첫 만남을 낯설어 하거나 인터뷰를 즐기지 않아 간단명료한 답변만을 내놓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30분 이상은 시간을 내기 힘들다”며 딱 잘라 말하던 그녀와의 인터뷰는 무려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고 그럼에도 미처 못 다한 질문들이 수두룩할 만큼 그녀는 많은 얘기들을 쏟아냈다.
특히 최근작이었던 KBS 드라마 ‘슬픔이여 안녕’이 대화의 중심에 섰을 때는 극중 아들 정우(김동완 분)를 버리고 혼자서 우여곡절의 삶을 살아온 나이트클럽 사장 강혜선에 대한 연민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연말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을 수상한 소감을 시작으로 인터뷰를 이어나갔다.
―먼저 수상을 축하한다. 다시 한 번 소감을 듣고 싶다.
▲3년 전에 ‘새엄마’로 우수연기상을 한 번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작품은 아침드라마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보는 사람들이 한정돼 있었다. 이번 ‘슬픔이여 안녕’은 주말드라마이다 보니 더 많은 관심과 축하를 받은 것 같다. 어디 가면 여러 분들이 ‘정호 엄마’ ‘강 사장님’ ‘불쌍해서 어떡해요’ 많이들 그랬다.(웃음)
▲ 두 사진은 10년도 더 된 과거 모습이지만 그 미모는 지금도 여전하다. | ||
▲처음에 이 역할을 받았을 땐 ‘내가 나이트클럽 사장에 사채업자야?’라는 의아심에 최현경 작가한테 되물었다. 그 캐릭터를 어떻게 잡아야 되는지 고민이 많았다.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사채업자라고 하면 무언가 주먹세계에서 놀아본 여자이고, 외모적으로도 굉장한 파워가 있고 여장부 같은 면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강한 캐릭터는 처음이라 부담스러웠겠다.
▲일단 작가가 원했던 거는 화장을 거의 안하고, 머리도 그냥 질끈 올린 그런 느낌이었다. 김치 하나에 밥을 먹는 장면 하나로 이 여자가 정말 알뜰하게 살아온 인생을 표현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머리스타일도 내가 연구를 하고 메이크업은 거의 안하고 의상도 화려하지 않게 그냥 셔츠에 치마나 바지정장 위주로 입었다. 강혜선을 연기하면서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는 발견을 했기 때문에 정말 남다른 애착이 갔다. 연기지만 험악한 조직의 ‘어깨’들한테 다 내가 ‘키운’ 애들이니까 마구 호통치고 그랬던 게 참 후련하고 속이 시원하기도 했다.(웃음)
―안타까운 얘기지만 시청률이 낮으면 그 연기와 노력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아닌가.
▲맞다. 시청률은 일단 좋아야 한다. 작가와 감독과 캐릭터 이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져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봐주는 사람들이 없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힘이 나지 않는다. 그럴 땐 너무 서글퍼진다. 그래서 방송사들이 시청률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 눈물연기 때문에 고생이 많았을 것 같다.
▲웃는 연기도 힘들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우는 연기다. 모든 기가 한순간에 쏟아져 나와야 한다. 대본을 보면 이 장면은 하이라이트라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번 드라마에서는 정우(김동완)가 내게 처음 ‘엄마’라고 부르고 내가 맺힌 한을 모두 쏟아내며 우는 장면이었다. 그 대본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울었다. 연기할 때 그 감정이 퇴색될까봐 일부러 대본을 많이 보지 않고 그 감정을 간직했다. 강혜선은 드라마 초기엔 많이 등장하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주인공으로 그려지더라.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개런티 더 많이 받았어야 하는 건데’ 그런 농담도 했었다.(웃음)
―아들 역으로 나왔던 김동완에 대해 어떤 느낌을 받았나.
▲난 동완이라는 사람을 이 드라마에서 처음 봤다. 그 전에 신화라는 가수들이 노래할 때는 잘 몰랐다. 에릭하고도 연기해 봤는데, 에릭이 이번에 MBC에서 최우수연기상인가 받았고 동완이는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그런데 동완이가 그전부터 연기를 했다고 하더라. 영화에도 출연했고. 그래서 내가 ‘신인상을 받으면 안 되는 거였네’라고 그랬더니 동완이가 ‘아니에요, 저 신인상 너무 받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더라. 그 말을 듣고 참 속이 깊고 앞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친구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중년 연기자들한테 연말의 시상식은 남다른 감회를 줄 것 같다.
▲이번에 SBS에서 연속극부문 여자연기상을 받은 견미리씨가 나한테 그러더라. “언니, 이제는 언제 이런 상 받을지 몰라. 언니 점점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상 받기 힘들기 때문에 이거 잘 간직해야 돼”라고. 나야 이번에 감독이나 작가, 캐릭터 모두가 잘 맞아서 좋은 결과가 있었지만 언제 또 이런 좋은 기회가 올지 모르는 거다. 그래도 중년배우는 살아있어야 한다.(웃음)
▲ 사진 위부터 영화 '은마는 오지 않는다', 드라마 '새엄마','명랑소녀 성공기', '슬픔이여 안녕', ‘ KBS 연기대상’에서 우수연기상 수상 장면. | ||
▲SBS ‘덕이’에서 내가 고두심 선배님 동생 역할을 했다. 푼수면서 수다스럽고 억척스러운 인물이었는데 그 역할을 하면서 내 연기의 폭이 굉장히 넓어진 것을 느꼈다. 그때 내가 이젠 그저 예쁜 연기가 아닌, 빨리 아줌마나 엄마로 변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위풍당당 그녀’나 ‘명랑소녀 성공기’와 같은 작품을 하면서 중년배우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 같다.
―17세에 데뷔했으니 그 당시로서도 참 어린 나이였다. 공백기가 거의 없이 꾸준하게 활동해 왔는데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난 지금도 대본을 받으면 신인처럼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가끔은 ‘내가 바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웃음) (작가)김수현 선생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선생님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게 좋은 거야. 자만하는 건 배우로서의 자세가 아니다’라는 얘기를 해주셨다.
―이미 91년에 ‘은마는 오지 않는다’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적이 있다.
▲(잊고 있었다는 듯)그랬다. 그러고 보면 상복이 없었던 것도 아니네.(웃음) 그 작품이 워낙 좋았지. 그때 연기를 지금 보면 너무 부끄럽다. 정말 멋모르고 막 소리만 질러대서…. 지금 다시 한다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텐데.(웃음)
―일본 방송계에도 진출했던데.
▲나더러 원조 한류스타라고 하더라.(웃음) 88년 올림픽이 열릴 때 일본의 후지TV에서 한국연예인 중 MC를 구했다. 그때 쇼 프로그램 PD 세 명이 왔는데 그중 한 명이 조용필씨를 일본에 처음 소개한 PD였다. 그때 날더러 밤에 하는 쇼프로그램 진행을 하라고 해서 처음엔 싫다고 했는데 내 스케줄에 맞춰주겠다고 배려해 결국 1년을 진행했다.
―연극과 악극에도 출연한 경험이 있었다.
▲연극은 딱 한번 85년에 ‘미시시피의 결혼’이라는 작품을 했었는데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연극은 다신 안할 거다. 악극은 기회가 되면 또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악극 할 땐 노래도 불렀는데 주변에서 ‘좀 한다’는 칭찬을 듣기도 했다.(웃음)
―사실 중견탤런트로서 가끔 서러울 때도 있지 않나. 여주인공 자리를 후배들한테 물려주면서 혼란을 느끼는 배우들도 있는데.
▲연기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난 그때마다 ‘지금 연기를 못하는 배우들도 얼마나 많은데…’ 라는 생각을 하며 힘을 냈다.
―아까 일흔 살,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 거다. 사람마다 향기가 있는데 난 향기가 퇴색되지 않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시트콤을 꼭 해보고 싶다. 과장된 인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인물인데 대사가 너무 좋아서 코믹한 그런 인물을 연기하고픈 바람이 있다.
[프로필]
1962년 9월4일 출생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경력 : 1978년 미스해태, MBC공채탤런트 10기, 드라마 ‘홍길동’ ‘여인천하’ ‘왕의 여자’ ‘위풍당당 그녀’ ‘영웅시대’ ‘백만송이 장미’ ‘제5공화국’ ‘슬픔이여 안녕’, 영화 ‘빙점 81’ ‘잊혀진 계절’ ‘젊은 날의 초상’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와니와 준하’ 외 다수.
조성아 기자 zzang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