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령 기획사의 사기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진은 신민섭 기자가 연예인 지망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
영화 <범죄의 재구성>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염정아의 독백이다. 연예인 지망생들이 원하는 것은 당연히 연예계 데뷔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뭘 두려워할까. 예상외로 ‘혹시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장 큰 두려움이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염정아의 말 그대로 ‘게임 끝’이다. 속고 있는 게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할 무언가만 건네면 얼마든지 사기를 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까닭에서일까. 연예인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사기사건이 끊이지 않고 매년 서너 건씩 적발되곤 한다. 적발되는 건수가 이 정도라면 실제론 훨씬 더 많은 유사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어떤 과정을 통해 이 같은 일이 자행되고 있는 것일까.
지난 630호를 통해 <일요신문>에선 길거리캐스팅의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길거리캐스팅 매니저로 나서 중고생들을 만난 바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길거리캐스팅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는 어린 학생들의 심리에 접근할 수 있었고 길거리캐스팅을 내세워 고가의 학원비만 챙기는 연예 기획사로 위장한 연기 학원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연예인으로 데뷔시켜 준다는 이유로 지망생들의 금전을 갈취하고 심한 경우 성관계까지 요구하는 사기꾼들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기자가 직접 그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기자는 다시 거리로 나섰다.
가장 손쉬운 방법을는 기자가 유명 연예 기획사 소속 매니저라고 속인 뒤 연예인 지망생들을 만나는 방법이 있겠지만 이는 불법 행위라 불가능했다. 따라서 연예인 지망생의 가족으로 위장해 유사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연예 기획사를 찾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런데 법망을 피해 지망생들을 곤란케 하는 연예 기획사를 찾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알게 된 곳이 A 연예 기획사였다. 이곳은 최근에 문제가 된 아역배우 출신 이 아무개 씨가 운영하던 N 엔터테인먼트와 함께 지망생들 사이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업체로 손꼽힌다.
연예인 지망생과 연예기획사(또는 영화사 등)를 연계해주는 몇몇 사이트에 올라있는 A 연예 기획사의 주소는 여의도 소재의 한 빌딩이었다. 그런데 기자가 직접 방문해본 결과 주소로 기재된 곳에는 엉뚱한 회사가 있을 뿐이었다. 전화번호 역시 결번으로 나왔다. 말 그대로 유령 회사인 셈.
이와 유사한 회사들이 여럿 활동하고 있다는 게 연예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정상적인 연예기획사나 영화사에서 캐스팅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매니저들이 이런 실태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캐스팅 관련 일을 하며 연예인 지망생들을 많이 만났는데 의외로 유사한 피해를 입은 애들이 많았다”는 한 매니저는 “최근 검찰 수사로 여론이 악화되자 A 기획사가 활동을 중단한 것 같은데 곧 회사 이름을 바꿔서 다시 활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매니저는 “교제비 명목으로 몇 백만 원 정도를 낸 뒤 잘 안되면 ‘네가 운이 모자란 가 보다’라고 얘기하면 그만”이라며 “그런데 지망생들이 대부분 지방에서 서울로 온 애들이라 그 몇 백만 원 외에 서울에서의 거주를 위해 더 많은 돈을 쓰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한 어린 시절 갖게 된 연예인에 대한 잘못된 희망이 당사자의 인생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몇몇 연예인 지망생 소개 사이트에 등재된 연예 기획사 가운데 A 연예 기획사처럼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 업체가 몇 군데 더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고 여론이 잠잠해질 무렵 이들이 다시 활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게 매니저들의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연예인 지망생들이 바라보는 이들 업체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소개를 통해 연예인 지망생을 몇 명 만났다.
올해 스물 한 살인 김 아무개 양은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소개를 통해 서울로 올라와 연예인 데뷔를 준비 중이다. 고교 시절 ‘얼짱’으로 유명했던 탓에 연예계 데뷔를 권유받아 상경했는데 지난 1년 동안 별다른 소득을 얻질 못했다. 현재는 신생 연예 기획사에 소속돼 연예계 데뷔를 준비 중이다. 그는 연예인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사기 사건에 대해 “이런 사기 사건으로 연예인 지망생들이 하나같이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바보같이 사기나 당하는 사람인 줄 아는 데 이는 극히 일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연예계 데뷔를 명목으로 돈을 요구하는 연예 기획사는 대부분 사기꾼이다’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는 내용도 덧붙였다. 현재 소속된 회사와 계약을 하는 과정에서 김 양은 해당 회사의 등기부등본은 물론이고 자산 규모까지 직접 확인했다고 얘기한다.
또 다른 연예인 지망생인 이 아무개 양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연예 기획사 캐스팅 매니저의 눈에 띄어 길거리캐스팅된 이 양은 그 회사의 제안을 받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런데 해당 회사는 6개월 만에 문을 닫았다. 다행히 업체는 유령회사가 아니었던 탓에 별도의 돈을 건네지는 않았지만 연예인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그가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기란 쉽지 않았다.
“그때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연예인 데뷔를 꿈꿨어요. 여기저기 사이트에 프로필도 올려보고. 그러다 어느 회사에서 계약하자는 제안을 받았는데 연기 교습비를 달라고 얘기해 계약하지 않았어요.”
다행히 사기당할 뻔한 위기를 넘기게 됐다. 거기에는 남자 친구의 힘이 컸다. 비슷한 처지에서 만난 남자 친구는 현재 다른 연예 기획사에서 연습생 신분으로 연예계 데뷔를 준비 중이다. 그의 만류로 사기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던 것. 지금은 어느 정도 연예인에 대한 꿈을 접고 가능성을 보장받은 남자 친구가 성공하길 기원하고 있다고 전한다.
이런 사연을 접한 뒤 기자가 끼와 외모가 아쉽다며 유명 연예 기획사 매니저를 소개해줄 테니 만나볼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그에게 ‘기자’라는 직함과 ‘유명 연예 기획사’라는 카드를 내밀자 곧 ‘두려워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흔들리며 “만나보고 싶다”고 얘기한다.
이런 이유로 연예인 지망생을 대상으로 한 사기꾼들은 대부분 거짓 직함을 팔아 그들에게 접근한다. 올해 3월과 지난해 8월에 연이어 방송국 PD를 사칭한 사기범이 붙잡힌 사건이 있었고, 미국 동포 사회에서도 유명 연예인의 매니저를 사칭한 사기 사건이 만연하고 있다. 또한 최근 사기 혐의로 구속된 이 아무개 씨는 아역 탤런트 출신임을 강조했다.
“세상을 모르는 사람, 세상을 너무 잘 아는 사람, 모두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이는 역시 영화 <범죄의 재구성> 마지막에 나오는 박신양의 독백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얼마만큼 알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누구나 사기범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매니저들은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확인 과정을 거치라고 얘기한다. 방송국 PD라고 주장하는 경우 방송국에 직접 확인을 해보고 유명 회사(연예 기획사, 영화사, 드라마 제작사 등) 관계자라고 소개하는 경우 그 회사에 직접 문의를 해보라는 조언이다. 그 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는 신분이 정확히 확인됐다 할지라도 돈을 건네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만약 특정 연예 기획사가 어느 지망생에게 전속 계약을 요구한다면 이는 해당 회사에서 지망생의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순간부터 지망생은 해당 회사가 더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소중한 자산이자 상품이 되는 것이다.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지만 당연히 그 이후 투자는 회사의 몫이다. 다시 말해 절대 돈을 요구할 일이 없다는 얘기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