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일 울산 ‘매일 드림 콘서트’ 무대에 등장한 동방신기. | ||
지난 9일, 잠실구장에서는 ‘청소년의 사기 진작과 대중문화 발전을 꾀하는’ 드림 콘서트가 열렸다. 18팀이 출연 예정이었지만 객석의 약 5분의 3을 동방신기 팬이, 5분의 1을 슈퍼주니어 팬이, 그 나머지를 16개 팀의 팬이 차지한 형국이었다. 5~6시간씩 기다려 팬클럽별로 입장했다지만 붉고 푸르게 물든 매스게임 현장은 북한 로동당 전당 대회를 방불케 했다.
그런데 객석 사이에 내걸린 초대형 현수막이 수상하다. ‘이모 왔다 카만 있어 동방신기’ ‘30대도 시아홀릭’ ‘30대의 히어로 김재중’ ‘동방신기 다퍼줄껴’…. 초등학생부터 중고등학생이 주를 이룬 관객석이지만 사이사이로 화장이 세련된 직장 여성,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 언뜻 봐도 관광객은 아닌 듯한 일본 중년 여성들이 눈에 띈다. 경험에 따르면, 이들은 결코 타의에 의해 움직인 사람들이 아니다.
바로 전날엔 울산에서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천상지희 더 그레이스가 참가한 ‘울산 매일 드림 콘서트’가 열렸다. 문수 경기장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사려는데 이미 한 떼의 ‘일본 아주머니’들이 우산을 고르고 있다. 경호 용역과 오빠 부대의 전쟁이 치러지는 사이 대기실 주위는 PD나 기자, 주최 측 자녀, 형제 등 일명 ‘빽녀’들이 줄을 서게 마련이다. 얼굴 한 번 더 보고, 사인이나 사진이라도 얻을 기회가 있는 ‘특권층 팬’이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온 어머니나 언니들은 유독 멋을 낸 차림이며 ‘아이 때문’이라고 하면서도 꼭 한번 화장을 고치곤 한다.
아이돌이 연예계의 주류로 떠오르고 매스컴을 쥐락펴락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이 어른 팬들이 있다. 어른 팬들은 전폭적 지원으로 애정을 표현하며 조직 운영과 회계 관리에도 능하다. 연상 팬으로만 구성된 한 팬클럽 회원은 “그들이 원하는 건 뭐든 해주고 싶다”고 말한다. 직장인인 그들에게 1인당 1만~2만 원 걷는 건 일도 아니다. 작년에 가수 손호영이 1000만 원 상당의 믹싱 기기를 팬들에게 선물받았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이 부러움 혹은 우려 섞인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아이돌 팬들의 ‘아낌 없이 퍼주기’는 이미 신종 문화 현상이다. ‘기획 선물’일수록 마치 종교단체에서 ‘작정 헌금’을 모금하듯 회의를 통해 품목과 기한을 정해 모금하는 것이 특징이다. 1인당 음반 2장 사기 운동, 콘서트 응원 준비, 스태프에게 도시락과 의류 돌리기, 아이돌 관련 상품 제작, 팬픽(fan-fiction: 아이돌을 대상으로 한 소설) 제작 및 출판, 아이돌 5m 이내 접근 금지 운동(아이돌 보호 차원) 전개 등 기획사 못지않게 활동도 다양하다. 이런 조직적 팬클럽 활동은 대개 20대 후반 이상의 어른 팬이 주도한다.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도 해외 콘서트에 참가하거나 몇 장씩 음반을 사서 주위에 나눠주는 등 어른 팬은 실제적으로 아이돌의 누나 혹은 이모, 홍보 담당자, 경호원이나 다름없다. 젊은 남성들이 게임으로, 중장년이 골프로 커뮤니티를 형성한다면 여자들에겐 아이돌이 주 소재인 셈이다.
▲ 비오는 이날 콘서트에 와서 열광하는 팬들의 모습. | ||
아이돌이 돈이 되면서 기획사와 스타 지망생의 노력도 총력전의 양상을 보인다. 멤버마다 특별한 캐릭터를 부여하고, 눈 뜨는 순간부터 잠꼬대까지 카메라 앞에 생생하게 공개하고 은근한 섹스어필로 팬들을 중독시킨다.
아이돌 당사자는 팬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이들은 “관객이 꽉 찬 무대 앞에 서면 전율을 느낀다”고 말한다. 팬은 곧 자신의 미래이기에 장거리 레이스를 뛰듯 매 순간 팬들에게 어필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팬의 나이나 외모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순간의 실언이나 만남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얼마 전 TV에 출연했던 일반인이 모 보이밴드 멤버와 기념사진을 찍은 후 일부 팬의 악플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은 충격적이다.
아이돌은 이성 교제뿐 아니라 제모를 하거나 화장실에 갈 자유도 없다. 조금만 외모에 변화를 주거나 실수라도 하면 수없는 ‘분노의 캡처질’에 의해 적나라하게 클로즈업된다.
아이돌 밴드를 촬영할 때마다 스타일리스트와 담당 기자는 2배로 긴장하곤 하는데, 자칫 모두에게 똑같이 신경 쓰지 못하면 삐치거나 무성의하게 촬영에 임하는 멤버가 생기기 때문이다. 몇 미터 이내에서 보는 아이돌은 프로필처럼 장대 같지도, 완벽한 ‘내추럴 본(natural born) 꽃미남’도 아니다. 서로 김밥을 빼앗아 먹고 머리 뻗칠까봐 ‘왁스발’ 신경 쓰고, 줄어든 배 둘레에 으쓱해지는 평범한 청소년들…. 그래도 이들은 확실히 빛이 난다. 수많은 여자들의 끝없는 애정을 받고 있기 때문일까. 사랑 받는 남자는 빛이 난다.
류일란 프리랜서
사진=장진영
촬영 협조=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