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1945> (왼쪽)와 <대조영> 촬영 현장의 보조출연자들. 노조를 결성한 보조출연자들은 최근 캐스팅업체 세 곳을 부당노동행위로 고발했다. | ||
‘보조출연자’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상황 연출을 위해 대사 없이 출연하는 이들을 일컫는다. 사극드라마의 전쟁신과 같은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서는 조·주연배우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 그러나 보조출연자들이 촬영현장에서 자신들이 인간 대우조차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지난 14일 여의도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문계숙 서울지역 보조출연자 노동조합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문 위원장도 원래 보조출연자였다. 우연히 이 일을 시작했다는 문 위원장은 현장에서 느낀 캐스팅사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지난해 9월 노동조합을 만들어 보조출연자들의 대변인을 자처하고 있다.
현재 서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는 4000여 명. 이 중 2500명은 보조출연을 전업으로 삼고 있다. 연령층은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지만 50~60대 후반이 가장 큰 비율(60%)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이 하소연하는 캐스팅사의 횡포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문 위원장은 “보조출연자를 통솔하는 캐스팅사의 ‘반장’들이 반말은 기본이고 욕설도 서슴지 않으며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을 하는 게 예사”라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라 촬영을 기다리는 동안에는 화장실을 가는 것, 물을 마시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고. 38℃가 넘는 폭염 속에서 몇 시간 동안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 하면 영하 20℃를 밑도는 엄동설한에 살수차가 뿌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어야 한다.
열악한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는 이도 많다. 사극드라마 촬영 당시 세탁이 안 된 의상을 입었다가 피부염에 걸렸다는 한 보조출연자는 “어제 누군가가 입은 의상을 다음날 다른 이가 입고 그 다음날 또 다른 이가 입고 하다보니까 자연스럽게 피부병이 생기더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또 다른 출연자도 “액션장면을 촬영하다가 갈비뼈에 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는데 촬영에 방해되니 카메라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있으라는 말을 들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문제는 부상을 당한 이에게 치료비조차 지급되지 않는다는 점. 보조출연자는 일용직 노동자로 구분돼 산업재해 보상도 받을 수 없으며 한 달 일해 손에 쥐는 30여만 원으로 병원을 가기도 쉽지 않다.
보조출연자가 하루 12시간 이상 촬영하고 받는 돈은 식대를 포함해 4만 6000원. 그나마도 월급 형태로 돈이 지급돼 당일 식비와 숙박비는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사에서 지급되는 보조출연자의 일당은 하루 8시간을 기준으로 5만 400원이다. 식대를 포함하면 총 6만 1300원, 숙박비까지 합치면 9만 4000원이 출연비로 지급된다. 실제 보조출연자가 받는 돈은 50%도 안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한 야간 촬영이나 철야를 하면 임금에 각각 50%, 100%씩 가산돼 지급되지만 보조출연자가 받는 돈은 늘 일정하다.
문제가 많음에도 이들이 보조출연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문 위원장은 “퇴직자들이 한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이 일을 하는데 힘들다고 그만둘 수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가끔 반장에게 불만을 토로해봤지만 다음부터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 말 한마디 못하게 됐다고. 노동조합에 가입한 500여 명의 조합원도 일거리가 끊긴 상태다.
물론 보조출연을 오래하면 단역 배우로 캐스팅되는 기회를 얻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역 배우의 하루 출연료는 10만 원, 대우도 보조출연자보다 좋다. 그러나 보조출연자 대부분이 단역 배우 출연 요구를 거절한다고 한다. 단역 배우로 드라마 한편에 출연하는 것보다 보조출연자로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