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년 12월18일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가 중앙선거관리위 원회로부터 당선통지서를 전달받았다.[88보도사진연감] | ||
87년 노태우 당선자는 당시만 해도 서슬이 퍼렇던 전두환 정권의 위세에 눌려 ‘정권인수’란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 결국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라는 어정쩡한 기구를 통해 힘겹게 권력을 접수했다.
92년 김영삼 당선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라는 공식기구보다는 비선 조직의 힘을 빌려 권력이양작업을 벌였다. 그 결과 인수위원회가 취임식 준비나 하는 곳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97년 김대중 당선자는 역사상 처음 맞이하는 여야 정권교체의 주인공이었다. 하지만 각종 공문서가 파기되고 안기부가 인수위에 보고를 거부하는 등의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번 대선이 끝나면 출범할 ‘인수위’는 어떤 장애물들을 만나게 될까. <일요신문>은 지금까지 3번 이루어진 정권교체기의 비화들을 소개하면서 권력이양기의 변수들을 미리 점검해보고자 한다.
노태우 당선자 지금부터 15년 전인 1987년 12월16일 제 13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를 여유있게 누르고 13대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 당선자는 대통령 취임 38일 전인 88년 1월18일이 되어서야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당시 정권 인수인계에 대한 전례가 없어 선거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뒤에야 ‘한시법’으로 대통령 취임준비위원회 설치령이 제정돼 취임준비 절차를 밟았다.
노 당선자는 그로부터 한 달 뒤인 2월19일에서야 행정부 조각작업 및 청와대 비서진 인선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취임식을 불과 5일 앞두고 보좌진 진용을 구성했을 정도로 준비가 부족했던 게 사실이었다. 당시 준비위원회가 활동하던 두 달 여 동안 전-노 양측은 많은 갈등을 겪고 있었다.
처음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열매를 맺으면서 겪게 될 당연한 ‘산고’였는지도 모른다. 전-노 양측은 대통령의 이임식과 취임식을 둘러싸고 본격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당시 이.취임식소관부처였던 총무처의 장기오 장관은 대선이 한창이던 11월에 손근호 차관을 이-취임식 사례 수집을 위해 프랑스 미국 등지로 해외출장을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나라가 신임대통령을 중심으로 행사를 하고 퇴임하는 대통령은 임기만료로 그만이더라는 것이었다. 이-취임식과 함께 하는 나라는 우루과이 한 곳뿐이었다고 한다.
총무처는 외국의 사례에 따라 취임식 위주로 행사를 진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청와대 보고과정에서 이런 생각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청와대측이 “군대의 이-취임식에서도 떠나가는 사람이 먼저 인사를 하고 취임식을 하는 게 관례인데 왜 이취-임식을 함께 하지 못하느냐”며 총무처 간부에게 호통을 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 차관은 훗날 “이-취임식을 함께 하자는 발상은 군사문화의 소산”이라고 지적했다고 한다. 총무처는 이-취임식 진행 계획을 87년 12월 말에 노태우 당선자에게 보고했다. 의외의 계획을 보고받은 노 당선자측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이병기 보좌역은 나름대로 취임식 준비를 하던 차에 이런 계획을 듣고 “대통령 취임식이 무슨 사단장 이-취임식인 줄 아느냐”고 이-취임식 동시실시 방안에 제동을 걸었다. 손 차관이 “우루과이에서 이렇게 하는 전례가 있다”고 설명했지만 이 말은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다. 노 당선자측은 “우리가 배울 나라가 없어 우루과이를 본받느냐” “그런 것을 알아보러 해외출장까지 갔다 왔느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고 한다.
▲ 92년 12월19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자가 지지자 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 ||
그런데 전 대통령에게 올라간 임명요청은 시간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이-취임식 동시거행을 반대한 최병렬 현홍주 위원에 대해 전 대통령측이 거부감을 나타낸 것이다. 이 두 사람을 위원직에서 빼지 않는 한 나머지도 임명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결국 이춘구 위원장만 정식으로 임명되고 나머지 위원 6명 모두는 파견형식으로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준비위원을 맡았던 강용식 국회 사무총장은 이에 대해 “당시만 해도 전 대통령의 권위가 엄청나게 막강했던 때다. 오죽하면 명칭도 대통령직인수위원회란 말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취임준비위원회라고 했겠는가. 법적인 취임준비위원은 이춘구 위원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6명은 전두환 대통령이 사인을 하지 않아 임명장도 받지 못했다. 삼청동 금융단 연수원에서 약 두 달 동안 인수위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92년, 97년에 비해 활약이 그리 크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김영삼 당선자 제 14대 대통령 선거는 1992년 12월18일 실시됐다. 김영삼 당선자는 노태우 대통령의 경우와는 달리 발빠르게 인수위원회를 구성하고 권력승계 작업에 들어갔다.
92년 대선이 끝난 며칠 뒤인 12월24일 당시 노태우 정권의 국무회의에서 ‘제 14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설치령’이 의결됐다. 당시 김영삼 당선자는 취임준비기구 명칭을 ‘정권인수위’로 하자고 ‘당당하게’ 정부에 제의했다고 한다.
강력한 정권교체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정부측이 형식상 ‘대통령직 인수위’가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바람에 김 당선자가 할 수 없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당시 정원식 위원장을 비롯, 박관용 신경식 장영철 최병렬씨 등 15명의 인수위원이 임명되었는데 ‘당연히’ 당선자가 임명장을 주었다고 한다.
김영삼 당선자는 ‘친구’의 도움으로 대통령이 되었던 노 당선자와는 달리 중립내각에서 4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또한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배경에 힘입어 정권인수 때부터 마음껏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활동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당시 김영삼 당선자가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 탓이다. 예전에 비해 위원 수는 15명으로 늘어났지만 주로 정부의 업무현황 파악과 정부이양에 따른 업무조정, 취임식 준비 등 실무적이고 기능적인 일만 했다. 여기에는 인수위원들을 지역안배 차원에서 골랐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전문성이 떨어져 인수위가 정부업무조차 제대로 파악하는 데도 벅찼다는 평가도 있었다.
당시 김 당선자는 정권구상을 가다듬는 비선조직을 갖고 있었다. 조각을 위한 인사파일 등은 ‘임팩트코리아’로 알려진 동숭동팀에 의해 주로 만들어졌다. 이 조직은 전병민씨가 이끌고 있었는데 교수 연구원들로 이루어진 정책관련 자문연구위원 그룹이었다.
각계 전문가 50여 명으로 구성됐는데 YS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충범씨 등이 주도한 ‘영소사이어티 그룹’도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었다. 이 바람에 인수위는 대통령 취임식 준비에만 주력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비선 조직에서 활동했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사실 김 당선자는 당 경선 이후 비밀연구반을 만들어 6개월 동안의 작업 끝에 2백50개 개혁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87년 노 당선자 때는 국정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했으면서도 취임준비위에서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교훈으로 우리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5년간의 집권계획서를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말했다.
▲ 98년 2월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 대통령. | ||
김 당선자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의자 교체를 지시한 것은 과거 내가 청와대에 갔을 때 문제라고 생각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청와대 의자였기 때문이다. 회의실 의자에 앉으면 크고 푹신한 의자에 몸이 푹 파묻히면서 뒤로 비스듬히 젖혀지게 되어 있었다. 의자가 아니라 소파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한담이나 나누는 데 적합한 이런 의자에 앉아서 도대체 무슨 회의를 하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할 수 있는 의자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김대중 당선자 그로부터 5년 뒤에 벌어진 1997년 12월18일 제 15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당선자는 대통령직 인수위를 YS 때와 비슷한 시기인 12월26일 출범시키고 이종찬 위원장을 비롯해 25명의 인수위원을 확정 발표했다. 그런데 김 당선자는 이미 선거 직전 측근 인사들에게 정권인수를 위한 연구를 지시해 놓았다고 한다.
여야 간 정권교체가 처음으로 이뤄져 국내 전례가 없었던 만큼 2~3개의 팀을 만들어 외국 사례를 집중 연구했다는 것. 특히 대통령제 아래에서 정권교체가 잦았던 미국의 관련자료를 확보하고 이 과정에서 미 행정부의 협조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을 맞이한 김대중 당선자 진영은 예전의 두 당선자 시절과 같이 어려운 권력승계 작업을 해야만 했다. 특히 여야의 권력이동은 지금까지 일어난 것과는 본질적으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청와대 안기부 군 검찰 경찰 등 구 여권체제를 형성했던 거의 모든 권력집단이 대변혁을 겪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외환위기 사태를 불러온 정권을 교체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정권 인수인계작업은 ‘혁명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때로는 감정적이기까지 했다.
다음은 당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활동중 벌어졌던 한 장면이다. “웬 코가 그리 크냐.” 청와대 조홍래 정무수석은 인수위 정무분과위원회에서 ‘점령군’ 위원들로부터 인신공격에 가까운 핀잔을 듣고 있었다. 못들은 척 꾹 참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 다른 위원이 “그런 코는 난생 처음이다”고 재차 쏘아붙이며 ‘희롱’을 계속하자 김정길 분과위원장이 황급히 제지에 나섰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영삼 정권에서 사법처리를 당한 적이 있는 다른 위원이 조 수석을 향해 “똑바로 한 게 뭐가 있느냐. 당신들 때문에 나라가 요모양 요꼴이 됐다”며 호통을 쳤다.
김 당선자의 인수위는 외환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특히 예산집행이 큰 문제였다. 두 달여의 인수위 활동 기간 동안 책정한 예산은 5억3천1백61만원이었다. 5년 전 김영삼 당선자 시절 예산 5억4천4백31만원보다도 적은 금액이었다.
당시 인수위 김한길 대변인은 “5년 전 인수위 참여인원은 91명인데 지금은 2백8명이고 그동안 물가상승 등을 감안하면 예산이 절반 이상 줄어든 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제대로 집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위원들에게 지급할 경비를 청구해도 정부에서 돈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인수위 살림살이는 이종찬 위원장 등이 십시일반으로 꾸려나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김대중 당선자가 확정되면서 일각에서는 과연 안기부나 군 등의 전통적인 ‘DJ 비토’그룹들이 김 당선자에게 충성을 다할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하지만 안기부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새 정부에 적응하고 있었다. 한 안기부 고위 간부는 “개표방송을 보면서 그를 ‘DJ’라고 호칭했던 간부들이 다음날부터는 바로 당선자라고 불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당선자 시절 DJ는 매주 두서너 차례 안기부로부터 주요 정보를 보고받았다. 안기부 업무보고 때 권영해 안기부장과의 30분 독대 이후 정례화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보의 질이 당선자쪽으로 무게가 실리면서 자연히 청와대로 가는 보고서의 두께는 얇아지게 되었다고 한다.
김 당선자에게는 최신 고급정보가 들어가고 있는 데 반해 청와대에는 ‘신문보도 수준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정보가 올라가고 있었다는 것. 이것은 대선 이후 벌어지는 권력이동의 적나라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