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추진됐던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의 합병은 엔지니어링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그러나 증권사들이 실권주를 대거 인수하면 합병 주총은 무난히 성사될 수 있다. 연합뉴스
# 완전 자본잠식인데, 감자 없는 증자?
올 3분기 말 삼성엔지니어링의 자본총계는 -4730억 원이다. 완전자본잠식이다. 적자가 계속되면서 자본금 2000억 원과 주식발행초과금 566억 원을 모두 까먹은 결과다. 보통 자본잠식 기업의 재무구조 정상화는 무상감자와 유상증자의 과정을 거친다. 장부상 자본금(2000억 원)과 실제 자본(-4730억 원)의 차이를 일치시키기 위해서다. 자본잠식 비율이 클수록 감자 비율도 높아진다.
감자를 위해서는 주식병합을 위한 정관변경이나 주식소각을 위한 주주총회 특별결의를 거쳐야 하지만 삼성엔지니어링은 아직 이 같은 절차를 밟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물론 현재 삼성엔지니어링의 주가가 액면가를 웃돌고, 시가총액도 설립자본금보다 많아 반드시 감자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증자자금으로 결손을 해소하면 된다.
회사 측에서는 12월 7일 발행할 수 있는 주식의 수(수권자본금)를 6000만 주에서 3억 주로 늘리는 정관변경을 위한 주주총회만 고시한 상태다. 그러면서 “재무구조 개선을 위해 2016년 3월 말 이전까지 유상증자를 추진할 예정으로, 증자 전 정관변경을 통해 수권주식수를 늘리고자 한다”고만 설명했다.
# 경영실패는 삼성이, 부실처리는 증권사가?
삼성엔지니어링은 내년 3월까지 1조 2000억 원 규모의 주주배정 유상증자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 측 지분은 삼성SDI 13.1%, 삼성물산 7.81%, 삼성화재 1.09% 등 약 22%다. 지분 비율대로면 삼성이 낼 돈은 2640억 원 남짓이다.
1조 2000억 원이 투입되면 자본계정은 ‘플러스(+)’로 바뀌지만 업황은 좀처럼 나아질 조짐이 없다. 증자에 참여해봐야 당장 주가가 더 올라갈 확률이 지금으로서는 낮다는 뜻이다. 안희준 한국신용평가 연구원은 “최근 유가 하락에 따른 산유국 재정수지 악화로 중동 플랜트 발주 규모가 축소될 가능성을 감안할 때 당분간 수주 감소 추세는 불가피하다”면서 “두 차례의 대규모 손실인식으로 해외 프로젝트 사업 역량이 약화된 것으로 보이고 향후 영업실적 개선에 대한 불확실성도 크게 확대됐다”고 분석했다.
이미 국민연금을 비롯해 삼성엔지니어링의 5% 이상 주주였던 기관투자자들은 이미 주식을 처분한 지 오래다. 기관이 떠나면서 지난 연말 기준 61.89%이던 소액주주 보유 주식은 올 들어 더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 전망이 불투명한 만큼 소액주주들이 증자에 응할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그런데 이번 유상증자는 주관 증권사들의 총액인수 방법으로 진행한다. 구주주들이 인수하지 않는 신주를 주관 증권사들이 매입하는 방식이다.
이번 공모는 삼성과 거래관계가 많은 NH투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대표주관사로 3000억 원씩을 책임진다. 또 KB투자증권, 신한금융투자, KDB대우증권, 하나금융투자가 각각 1500억 원씩을 맡는다. 증권가 관계자는 “기업공개(IPO) 과정에서 신주를 발행할 경우, 또는 기업이 채권을 발행할 때 주관 증권사가 이를 총액으로 인수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완전자본잠식 기업이 감자도 없이 주주배정 증자를 하는데, 증권사들이 총액인수를 통해 실권주를 떠안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자칫 증권사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유상증자에서 주관 증권사들이 받는 수수료율은 40bp(0.4%)로 고작 50억 원 남짓이다.
# 최종목표는 삼성중공업과 합병?
현재까지 삼성엔지니어링이 내놓은 자구계획은 유상증자(주주배정 후 실권주 일반공모)와 장부가 3500억 원 규모의 본사 사옥 매각뿐이다. 시장에서는 그룹 차원의 지원이 있어야 주주들의 참여나 증권사들의 실권주 인수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는 평가다. 하지만 삼성그룹에서는 아무런 입장표명이 없다. 삼성이 삼성엔지니어링을 도울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당내부거래 논란이 일 수 있고, 지원주체가 될 계열사 주주들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반면 삼성중공업과의 합병은 묘수가 될 수 있다. 삼성중공업은 이익잉여금이 3조 6000억 원이 넘는다. 삼성엔지니어링이 일단 내년 3월까지 상장 유지를 위해 자본잠식을 해소하는 유상증자를 실시하고, 이후 삼성중공업과 합병하는 방법이다. 삼성 입장에서는 돈 들이지 않고 삼성엔지니어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 추진됐던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은 삼성엔지니어링 주주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증권사들이 실권주를 대거 인수하면 지분구조가 삼성에 우호적으로 바뀌어 합병 주총은 무난히 성사될 수 있다. 삼성은 2004년에도 경영위기에 직면한 삼성캐피탈을 삼성카드와 합병시켜 정상화시켰다.
# 증권사 실권주 인수로 대박 노리나
삼성엔지니어링이 1조 2000억 원을 증자하려면 현 주가 기준으로 7000만~8600만 주(할증률에 따라 다름)를 새로 발행해야 한다. 그런데 정관상 일반공모 증자는 이미 발행한 주식(4000만 주)의 30%까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정관변경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데 이번 증자를 해도 총발행주식수는 1억 1000만~1억 2500만 주다. 발행가능 주식수를 3억 주로 늘리면 추가발행여력으로 1억 7500만~1억 9000만 주가 남는다. 이는 삼성중공업과의 합병 재추진에 활용할 만하다.
보통 흡수합병은 인수법인이 피인수법인 주식을 인수하는 대신 신주를 발행해주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삼성중공업이 발행한 주식수는 2억 3088만여 주로, 발행가능 주식수 2억 4000만 주를 거의 채웠다. 현재 삼성중공업 주가는 삼성엔지니어링의 0.8배 미만이다. 삼성중공업 1주당 삼성엔지니어링 0.8주 미만을 발행하면 3억 주 이내에서도 인수가 가능하다. 투자은행(IB) 업계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해가 빠르다.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 합병 재추진 가능성은 꾸준히 제기돼왔다. 삼성으로서는 추가부담 없이 삼성엔지니어링을 처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다. 지난해 했던 합병 추진이 그 증거다. 유상증자 후 두 회사가 합병할 경우 참여 증권사들도 손실을 볼 가능성이 낮아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큰 수익이 날 수도 있다. 증권사들이 이 같은 가능성을 모두 염두에 두고 실권주 인수를 결정했을 수 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