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장훈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호텔 로비에서의 취재가 허락되지 않은 상태라 박지성과 인터뷰하려면 다시 밖으로 나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기자가 로비 안으로 들어가 박지성에게 인터뷰 협조를 요청하자, 박지성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저도 이제 정중하게 취재 요청 안하시면 카메라 대신 취재수첩을 뺏을 거예요”라고 말하면서 슬며시 웃었다.
이렇듯 기자라는 타이틀만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선수를 붙잡고 인터뷰를 강요하는 옛날 방식은 요즘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앞서 선수들이 ‘인터뷰의 추억’을 밝힌 데 이어 이번엔 일선 취재기자들이 선수들을 인터뷰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털어놓았다. 방송과 지면을 통해 나타나는 스포츠 스타들의 인터뷰와 그 이면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는지 기자들이 고백한 ‘인터뷰의 추억’을 모아본다.
▲ (위부터)박지성 이상민 이천수 | ||
“서장훈은 언론이 뭘 요구하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다. 중3 때부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살아오면서 기자들과 공생관계를 이룬 그는 기자들이 받아쓴 그대로 기사를 만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잘 교열된 문장을 꺼내 놓는다. 고급 영어를 구사하는 까닭에 가끔은 용병들과 함께 인터뷰실에 들어왔다가 종종 통역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골리앗’이니 ‘슈퍼 공룡’이니 하면서 인간적인 모욕감을 안기는 몇몇 스포츠지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 서장훈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기자한테 전화를 걸어 특종성 정보를 제공하며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1999∼2000년 현대와 SK의 프로농구 챔피언 결정전을 앞둔 시점인데 현대의 이상민과 이상민의 전담 마크맨 SK의 석주일이 동서지간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프로축구에선 잘 알려져있다시피 스페인리그에서 활동중인 이천수(레알 소시에다드)가 특유의 ‘말발’과 탤런트를 능가하는 ‘끼’로 취재·사진기자들 모두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 지난 13일 해외파 특별훈련에 가장 늦게 나타난 이천수는 먼저 인사를 나눈 기자한테 “좀 놀고 싶은데 협회에서 도와주질 않네”라며 불평(?)을 늘어놓다가 기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 가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특별훈련이 정말 기대된다. 그러나 집에 제사가 있는데 참석하지 못해 좀 아쉽다”는 ‘방송용 멘트’를 흘리기도 했다.
이천수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기자가 “제사는 밤에 지내는데 제사와 특별훈련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지적하자 이천수의 현란한 애드리브가 발휘됐다. “아, 물론 그렇지만 제사를 앞두고 경건한 마음으로 수양을 쌓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맞받아쳤던 것. 또 다른 기자가 “그런데 오늘 누구 제사냐”고 다시 묻자, 이천수 왈, “글쎄요. 할머니인가? 아니 할아버지인가?”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기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국민타자’ 이승엽도 프로야구계에선 말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지만 너무나 ‘범생이’다운 멘트만 해서 획기적인 ‘꺼리’를 기대하는 기자들 입장에선 그리 ‘반가운’ 선수는 아니다. 단 어떤 인터뷰에도 성심성의껏 임하는 자세만큼은 높은 점수를 받는 편.
이영표는 축구선수 그만두고 목사가 돼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설교식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라고 한다. 일간지에서 축구 전담 기자로 활동중인 K기자는 이영표와 인터뷰를 하다보면 마치 이영표가 목사고 자신이 신도가 된 양 착각이 들 정도라고.
한편 인터뷰 태도에서 기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그리 ‘호평’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도 있다.
프로농구에선 이상민이 대표적이다. 스포츠지의 농구 담당 S기자는 “이상민이 평소 ‘운동선수는 운동만 잘하면 된다’는 신념이 강해 농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방송 출연이나 인터뷰 요청은 정중히 거절한다”면서 “특히 이상민은 구단과 연봉 계약을 맺을 때마다 부대조건으로 ‘매스컴과의 인터뷰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등 나름대로 언론 노출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이승엽 | ||
‘골프 여왕’ 박세리도 인터뷰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선수 중 한 명이다. 일간지에서 골프 담당 기자를 하며 얼마 전 LPGA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에 갔다왔다는 S기자는 “박세리와의 인터뷰를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이유는 LPGA 사무국으로부터 아무런 언급을 받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래도 한국에서 자신을 찾아간 기자에 대한 뭔가 특별한 배려를 기대했지만 박세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면서 스포츠 스타들의 달라진 위상에 대해 토로했다.
‘농구천재’ 허재(원주 TG)는 간혹 기자들한테 반말투로 대하는 ‘유일한’ 선수다. 만으로 38세인 최고령 선수 허재보다 나이가 많은 기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선수는 아니지만 전주 KCC의 신선우 감독의 인터뷰 스타일도 스포츠계에선 화제다. 신 감독은 신문기자와 방송기자에 따라 인터뷰 태도가 극과 극을 달린다. ‘태생적’으로 말을 약간 더듬는 신 감독은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런 증상이 심화되는 반면 방송기자가 마이크를 대거나 카메라 앞에만 서면 그 더듬던 증상이 완전 자취를 감춘다. 정확한 이유는 신 감독 자신도 알 수 없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