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는 오후 7시께 집회 현장에 도착했다.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찰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현장을 감시하는 경찰 역시 없었고 한 쪽에 경찰 소음관리차량만 있었다. 집회 자리에는 가로 10m·세로 3m의 판이 준비돼있었고 국제엠네스티 관계자들과 각 언론사 취재진들이 대기 중이었다.
7시 30분에 리허설이 시작되자 근처를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만난 김정우 씨(31)는 “멀리서 보니 신기해보여서 왔다”며 “평소 집회에 큰 관심은 없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어 재밌고 의미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홀로그램 판에 비친 유령집회 영상. 시위대와 경찰버스는 없었지만 구호와 행진은 있었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오후 8시께 김희진 국제엠네스티 한국본부 사무처장의 모두발언이 있었다. 김 사무처장은 “지난해 세월호 1주기 시위 후 시위가 지나치게 제한되고 있다”며 “2015년 1월부터 10월까지 시민들의 불편을 이유로 집회를 금지한 비율이 80%가 넘는다”고 말했다.
다만 모두발언을 듣는 사람의 대부분은 취재진이었고 일반 시민은 찾기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시민을 취재하기 위한 언론사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기자 역시 유령집회를 보러 온 시민들의 반응을 듣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나 취재진이 시민들보다 훨씬 많았으며 시민들의 반응도 시큰둥했다. 그러다 보니 취재진만 인산인해를 이뤄 기자들이 서로에게 “유령집회를 보러 온 시민이냐”고 묻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엠네스티 관계자들은 유령집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관계자 중에는 외국인도 있었다. 기자가 다가가 말을 걸자 그는 어눌한 한국어로 “저는 톰 레이니스미스이고 엠네스티 간사”라며 “영어강사일을 하고 있으며 사회활동을 병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톰 간사는 “추워서인지 찾아온 시민은 별로 없지만 우리는 자유로운 참석을 원한다”며 “이런 행사를 통해 우리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고 전했다. 기자는 김희진 사무처장에게도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며 말을 걸었다. 이에 김 사무처장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집회라기보다 이런 사회현상을 퍼뜨리는 게 목적”이라며 “사람들에게도 ‘집회하세요’가 아닌 ‘놀러오세요’라고 알렸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 행사는 집회가 아닌 문화제로 신고가 돼 진행됐다.
오후 8시 30분께 본 유령집회가 시작하자 취재진들의 카메라는 바쁘게 움직였다. 홀로그램 판에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장면이 나왔다. 스피커에서는 “평화시위 보장하라(보장하라 보장하라)”는 구호가 흘러나왔다. 집회는 10분짜리 영상을 세 번 상영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영상이 끝나자 일부 시민들은 현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었다. 기자는 이 와중에 홀로그램에 집중하는 청소년 무리를 발견했다. 그들은 직접 홀로그램 영상 촬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었다.
취재에 응한 박상헌 군(16)은 “경찰이 집회를 불허하는 경우가 많아져 자유가 억압됐다고 생각해 참여했다”고 말했다. 박 군은 이어 “실제 거리 집회가 아니라 카메라를 의식해서 하다 보니 좀 어색했다”며 “그러나 직접 영상을 보니 신기하고 내가 어디 있는지 찾는 재미도 있다”고 전했다.
집회가 끝나자 취재진들도 철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자들 사이에서 “추우니까 사람도 없으니 빨리 하고 가자”는 목소리가 들렸다. 기자가 스마트폰을 켜 확인해보니 영하 2도의 추운 날씨였다. 실제로 김희진 사무처장 인터뷰 도중에는 펜이 얼어서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김 사무처장의 펜을 빌려 메모를 할 수 있었다.
이날 유령집회를 구경하는 시민들보다 취재하는 기자들이 더 많았다. 고성준 기자 joonko1@ilyo.co.kr
경찰은 만일에 대비해 병력을 배치했다고 하지만 현장 주위에서 상시 근무자를 제외한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엠네스티 측도 공식 집회가 끝나자 조용히 철수했다. 이날 기자가 만난 사람들의 대부분은 엠네스티 관계자와 기자들이었다. 구경 온 일반 시민들은 소수였다. 엠네스티 측은 촬영을 못한 취재진들을 위해 행사 종료 후 한 번 더 영상을 보여줬다. 취재진 사이에선 “이건 기자들을 위한 축제”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