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이 정부의 지나친 간섭 때문에 공유경제라는 당초 취지가 무색해진 것 아니냐는 비난이 나오고 있다.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그러나 공유경제의 세계적 트렌드를 놓칠 수 없을 터. 정부는 올해부터 크라우드 펀딩을 활성화하겠다고 나섰다. 그동안 소액투자에 목말랐던 스타트업 등 창업 분야에서도 적잖은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문제는 실현 방식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자발적으로 자금 중개가 일어나는 해외와 달리, 정부는 등록을 마친 중개업자에게만 크라우드 펀딩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이다. 중개업체가 우후죽순 생겨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비할 목적에서다. 정부는 중개할 수 있는 자금의 한도를 정하고, 설비, 경력 등을 따져 일종의 ‘한국형’ 크라우드 펀딩을 선보이겠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형이라는 수식어는 언제나 ‘관치’라는 그림자를 달고 있듯, 이번에도 어김없이 정부는 자신의 입장과 목표만을 반영한 계획을 내놨다. 투자자와 스타트업의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이 대표적.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온라인소액투자중개업자 등록매뉴얼’을 보면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에 뛰어들기 위해선 여러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우선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 사업자가 되려면 금융위에 등록을 해야 하며 최소 5억 원 이상의 자기자본을 마련해야 한다. 또 사무실과 업무장비 등 물적 요건을 채워야 하며, 대표자가 금융회사 경력이 있는지, 자본의 성격은 무엇인지 등 금융위의 심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명문화한 조건 말고도 충족해야 할 것들은 여러 가지 있다. 금융당국이 요구한 자기자본은 5억 원이지만, 비상경영 상황에서도 경영을 유지할 만한 충분한 추가 자본이 필요하다. 이 규모는 여러 주변 여건 등을 감안해 금융위가 자체 판단해 결정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최소 자기자본은 5억 원이지만, 대부분 창업기업이 비용을 많이 깎아 먹는 점을 감안하면, 추가적인 버퍼(완충자본)가 필요하며, 이는 서류 등을 보고 판단한다”고 했다.
또 정부가 요구하는 ‘증권형’ 사업자의 자격을 채우기 위해선 예탁결제원과 전산망이 연결돼 있어야 한다. 예탁결제원은 기업이나 증권사로부터 주식·채권 등 증권을 예탁 받아, 결제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유가증권 회사가 증권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탁결제원을 거쳐야 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모두 전산으로 이뤄진다.
이런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연간 수천~수억 원의 수수료를 내야 한다. 금융위는 이런 내용을 별도로 공지하지 않는다. 만약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 사업자로 뛰어들려면, 자본금과 사무실, 인력, 사무기기 외에도 이런 전산망을 설치하고 수수료를 내야 한다.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을 준비하던 사업자들은 ‘영세 사업자에게는 무리한 요구’라고 항의하지만 금융당국은 초지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다.
투자금액도 기업당 연간 총 500만 원으로 제한돼 있다는 점도 문제다. 투자금액이 적어 기업의 마중물 역할을 할지, 중개사업자가 적극적으로 자금 중개에 나설지 미지수다. 중개회사가 1%의 투자금 수수료를 뗀다면, 최소 1만 명의 투자자를 유치해야 고작 5억 원의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정부가 지나치게 간섭하는 바람에 크라우드 펀딩의 당초 취지가 무색해진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업계에서는 이런 진입장벽이 결국 자금력과 영업력, 인프라를 갖추고 있는 기존 금융회사에게 몰아주기 위한 조치라는 의혹도 제기한다. 사실상 신규 사업자가 진출하기 어려운 구조라 애초에 대형사에 초점을 맞추고 제도를 만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스타트업 관계자는 “과거 미소금융이나 창조경제 지원 자금처럼 위에서 시키니 하는 일인지, 과연 진정성을 갖고 임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증권형 크라우드 펀딩 중개 사업자로는 KB금융그룹 같은 대형 금융·증권사만 이름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온갖 사건·사고와 금융의 리스크를 차단한다는 점에서는 납득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크라우드 펀딩의 본질을 해치는 관치가 판을 치는 모습을 보면 씁쓸함이 남는다”며 “금융당국이 본질을 놓치고 ‘한국형’만 부르짖다간 ‘한국판’ 구글·페이스북·인스타그램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서광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