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0일 오전 11시 30분께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장안5리에 거주 중인 이 아무개 씨(48)는 낚시를 하기 위해 마을 일대의 농수로 관문을 찾았다가 김 아무개 씨(여·47)의 시신을 발견했다. 김 씨는 높이 2.5m, 폭 4m의 농수로에서 하의 속옷만 입은 채로 엎드려 숨져 있었다. 당시 농수로에는 물이 50cm 정도 차 있었다.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화성시 장안면 장안리의 농수로.
화성서부경찰서는 김 씨의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 1차 부검 소견을 지난 3월 21일 발표했다. 국과수 전문의는 김 씨의 시신에서 멍 자국과 긁힌 상처가 발견됐으나 사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는 않다고 밝혔다. 발견된 멍 자국과 긁힌 상처는 농수로로 떨어지면서 난 상처로 보인다고도 전했다. 경찰은 김 씨의 시신에서 성폭행 흔적도 발견되지 않은 데다 선홍색 시반이 관찰된 점을 미뤄 익사나 저체온증에 의한 사고사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김 씨가 평소 정신질환 치료제를 복용했던 주목하고 있다. 법의학 전문가들에 따르면 정신질환자의 경우 종종 저체온증으로 추위를 느낄 때 옷을 벗는 이상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이에 경찰은 법의학계 전문 서적과 전문가의 의견 등을 참고해 시신에 대한 정밀 감정결과를 지켜본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은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에는 물의 깊이가 낮은 데다 농수로의 높이가 2.5m라고 해도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 관문에 누구나 쉽게 빠져나올 수 있는 공간이 있었던 점 등을 미뤄 타살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거세다. 발견 당시 김 씨가 하의 속옷만 입은 채로 발견된 점도 타살의 정황이 된다는 게 주민들의 의견이다. 김 씨가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옷과 상의 속옷은 시신이 발견된 지점에서 185m, 255m, 315m 떨어진 농수로에서 발견됐으며, 신발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장소와 가장 인접해 있는 장안5리 주민 아무개 씨(여·70대)는 “농수로에 고인 물은 성인의 발이 잠길 정도”라면서 “5세짜리 꼬맹이라고 해도 익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같은 마을 주민 아무개 씨(여·70대)는 “아직 농사철이 아니라 집 한 채 없는 그곳을 찾는 이가 적다”며 “하필이면 넓은 농수로의 대로변 벽면에 시신이 놓여 있어 뒤늦게 발견된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씨와 같은 동네에 거주하는 장안2리 주민들은 김 씨의 사망을 정신질환과 연관 짓는 것에 대해 불쾌하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장안2리에서 슈퍼마켓 주인은 “40여 년을 봐왔지만 사고로 죽을 만큼 모자란 여자는 아니다”며 “스스로 옷을 벗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경찰의 입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전했다.
또 다른 동네 주민도 “다른 사람이 우울증을 앓다가 사고사로 죽었다고 하면 덜 충격적이었을 것”이라며 “김 씨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누구도 정신질환자인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증상이 경미할 뿐만 아니라 남들보다 밝고 말도 많은 편이었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가 딸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데 경찰이 정신질환에 의한 사고사로 몰고 가고 있는 것 같아 화가 난다”고 전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다룬 영화 ‘살인의추억’ 스틸컷.
일부 장안리 주민들은 김 씨의 사망이 화성연쇄살인사건이나 화성여대생피살사건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 장안5리의 한 여성은 “마을 여자들끼리 범인이 잡힐 때까지 빨간색 옷을 입지 않기로 입을 모았다”고 했으며, 장안2리의 한 여성은 “살인의 연속 또는 연쇄살인의 시작을 알리는 살인이 아닐까 걱정된다”면서 “이제 농사철이 시작돼 논에 나갈 일이 많은데 무서워서 혼자 다니기가 두렵다”고 전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6년 동안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진안리·황계리·병점5리, 정남면 관항리, 팔탄면 가재리, 동탄면 반송리 일대의 부녀자 10명이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2006년 4월 2일부로 마지막 10차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영구 미제사건이 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당시 20대로 추정된 점(생존 시 현재 50대 중후반 추정), 화성시의 다른 동네로 이사 갔을 가능성이 높은 점 등으로 볼 때 이번 사건과 연관돼 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일부 장안리 주민들의 주장인 것이다.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은 2004년 10월 27일 봉답읍에 사는 여대생 노 아무개 씨(당시 21세)가 수영을 마치고 귀가하던 도중 실종됐다가 46일 만에 인근 야산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보통리저수지 일대 곳곳에서 노 씨의 휴대전화와 옷, 운동화, 수영복 등이 4일에 걸쳐 발견됐고, 노 씨의 청바지에서 정액 DNA가 검출됐으나 국과수 요원에 의한 DNA 샘플 훼손으로 범인을 잡지 못한 채 미제로 분류, 지난해 8월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이번 사건이 타살일 경우 화성연쇄살인사건, 화성여대생피살사건과 비슷한 점이 많다. 우선 인적이 드물고 사람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곳에 시신을 유기했다는 점이다.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 관문 부근에 영농조합사무실(20m)과 철강공장(200m)이 위치해 있으나, 사람이 상시 상주하고 있는 곳은 아니다. 또 김 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과 김 씨의 옷이 발견된 지점을 잇는 배수로와 인접해 우사가 두 곳 있으나 사람이 거주하는 곳은 아니다. 김 씨의 시신과 옷이 발견된 배수로 인근에는 가로등과 CCTV조차 설치돼 있지 않다. 더구나 김 씨의 시신이 배수로의 대로변 벽면에 유기돼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띌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특히 김 씨의 옷이 배수로 안에서 발견된 점을 미뤄 김 씨가 배수로 안으로 지나갔을 가능성이 있어 목격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경찰의 해석도 있다. 김 씨의 시신에서 가장 가까운 민가는 300m 떨어진 장안5리에 있으며, CCTV는 그로부터 20m 더 떨어진 골목에 위치해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과 화성여대생피살사건에서의 시신도 인적이 드문 야산, 논두렁, 농수로 등에서 발견됐다. 김 씨처럼 농수로에서 발견된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는 2차(박 씨, 당시 26세), 4차(이 씨, 당시 22세), 7차(안 씨, 당시 54세) 피해자이며 3차 피해자(권 씨, 당시 26세)와 5차 피해자(홍 씨, 당시 19세)의 시신은 농수로 인근의 논두렁에서 발견됐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1차(이 씨, 당시 71세), 6차(박 씨, 당시 29세), 9차(김 씨, 당시 14세), 10차(권 씨, 당시 69세) 피해자와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의 피해자 노 씨의 시신은 인적이 드문 야산에서 발견됐다.
2002년 10월 서울시 강남구 논현동에 국내 최초의 방범용 CCTV 5대가 설치됐다. 다시 말해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던 1986년부터 1991년까지는 전국 어느 곳에도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의 피해자인 노 씨는 실종됐던 2004년 10월 27일 귀가하던 버스에 설치된 CCTV에 모습이 잡힌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이번 사건의 피해자인 김 씨 역시 사체가 발견되기 13일 전인 지난 6일 우정읍내의 한 식당에서 홀로 저녁식사를 하는 모습이 담긴 이후 단 한 차례도 CCTV에 포착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씨의 마지막 모습이 찍힌 우정읍내는 장안리에서 시내버스로 3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장안2리 주민 아무개 씨(여·60대)는 “김 씨는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어 종종 우정읍내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면서 “시신이 발견된 곳은 김 씨가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에서 2~3군데 지나서 내릴 경우 가장 빨리 집으로 가는 경로”라고 설명했다.
김 씨가 우정읍내에서 귀가하던 중 버스정류장을 잘못 내렸을 때 귀가 예상 경로.
이는 김 씨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안3리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장안제일교회나 장안4리입구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했다면 집으로 빨리 가기 위해 농수로 관문 인근을 지날 수 있고, 이 과정에서 봉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 경로에는 가로등과 CCTV가 단 한 대도 설치돼 있지 않다. 또한 우정읍내에서 출발하는 장안리 방향 버스는 하루 4회(오전 6시 20분, 9시 30분, 오후 8시 50분, 9시 30분) 운행해 김 씨가 우정읍내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귀가했다면 오후 9시~10시경 농수로 관문 일대를 지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과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의 피해자들처럼 김 씨의 옷이 벗겨진 채 발견된 점도 비슷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 10명 모두 옷이 벗겨지거나 하의 속옷만 입혀진 채 발견됐고,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의 피해자 노 씨의 옷과 속옷이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4km 인근에 뿔뿔이 흩어진 채 발견됐다. 김 씨의 시신도 하의 속옷을 제외하곤 모두 벗겨진 상태였으며 315m 이내에서 옷이 흩어진 채 발견됐다. 신발은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김 씨는 화성연새살인사건과 화성여대생피살사건의 피해자들처럼 성폭행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화성서부경찰서 조한권 형사과장은 “1차 부검에 대한 국과수의 소견을 발표하면서 성폭행 흔적이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히긴 했으나, 자세한 건 보다 정밀한 부검 결과를 통해 알 수 있을 것 같다”면서 “김 씨의 사체에서 DNA 추출을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설명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은 피해자들의 빨간색 옷과 비오는 날에 주목했다. 실제로 화성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을 당시 화성 지역에 비가 오는 날 홀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빨간색 옷을 입은 여성이 범행 대상이라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화성연쇄살인사건의 피해자들 중 빨간색 옷을 착용했던 피해자는 단 한 명에 불과하며, 사망 추정일에 비가 왔던 날도 두 번에 불과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김 씨가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발견 의상 중 하의의 색상은 분홍색이었다. 또한 김 씨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3월 17일과 18일의 날씨는 맑음, 비가 오진 않았다.
한편 김 씨의 사체가 발견된 농수로 관문에서 400m 지점에 321번 고속국도의 졸음쉼터가 마련돼 있어 타지인의 소행일 가능성도 있다는 지역 주민들의 의견도 있다. 또 인근 주민에 의한 호의동승(걸어가는 사람에게 호의를 목적으로 차에 태우는 것) 범행일 가능성이 높아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유시혁 기자 evernur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