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년 만의 타자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단맛’과 아시안게임 참패라는 ‘쓴맛’을 다 본 이대호. 내년 시즌엔 팀이 4강에만 오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며 소줏잔을 들이켰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KBO와 언론사 시상식이 모두 끝난 지난 14일, 부산 해운대 근처의 한 고깃집에서 만난 이대호는 시상식에 참석했던 후일담을 털어 놓으며 류현진에게 쏠린 스포트라이트 옆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에 대해 쓰린 속을 털어 놓았다.
‘거포’ ‘돼랑이’ ‘빅마마’ 등 195㎝와 120㎏의 육중한 체격을 빗댄 별명들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는 ‘귀여운 남자’ 이대호와 소줏잔을 기울이며 참으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MVP 인연 없네
“상이란 게 그러대요. 처음엔 그냥 기분 좋았어요. 열심히 고생한 보람도 느꼈고 행복감이 절로 묻어나더라구요. 그런데 4관왕이란 기록을 내고도 자꾸 찜찜해지는 거예요. 제 기록은 22년 만에 처음 나온 트리플 크라운이었어요. (류)현진이도 15년 만에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한 거구요. 그런데 시상식장에선 전 그냥 이대호였어요. 현진이는 최고의 스타였고. MVP는 모두 현진이 몫이었으니까요.”
시상식 스케줄의 마지막에 있었던 한 언론사 시상식에선 이대호가 류현진을 제치고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대호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앞선 시상식들에서 현진이가 너무 많이 수상하게 되니까 저한테도 한번 기회를 주신 것 같아요. 제가 속 좁게 후배의 수상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현진이는 충분히 MVP를 탈 만한 선수였고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현진이와 떼어 놓고 저, 이대호만 생각해 보세요. 올 시즌 제 성적이 현진이의 ‘들러리’ 정도로 머물 만한 건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기자들은 팀 성적이 안 좋아서, 100타점을 기록 못해서, 홈런수가 30개를 넘지 못해서 등등의 이유를 들며 제가 현진이한테 밀릴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구요.”
공식 인터뷰 자리에선 류현진한테 매번 MVP를 내주는데 대해 ‘서운하다’고만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었단다. 지난 겨울 체중 감량을 위해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체중감량훈련을 받고 피나는 동계훈련과 스프링캠프를 거쳐 올시즌 ‘거포’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 이대호로선 ‘때’를 잘못 만난 건지, 아니면 ‘운’이 없는 건지, 올시즌 MVP와는 큰 인연을 맺지 못했다.
정관 스님 고맙심더
지난해 10월 중순부터 54일간 머물렀던 통도사 극락암은 이대호의 야구 인생에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의 장소’다. 조금만 성적이 좋지 않으면 팬들로부터 ‘살 빼라’는 소리를 들었던 이대호는 김민호 코치의 추천으로 당시 팀 트레이너였던 장재영 코치와 함께 통도사에 올랐다.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5시간 동안 해발 1081m의 영축산을 오르는 극기 훈련을 벌이며 몸과 마음을 단련시킨 것이다.
이대호를 잡아준 사람은 정관 스님이었다. 야구를 좋아하는 팬이었고 메이저리그 경기를 빠짐 없이 챙겨보는 마니아라 이대호의 고민과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전문가 못지 않은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단다.
“통도사에서 제일 유머러스한 스님이세요. 제가 스님과 농담을 하고 웃고 떠들면 주위에서 신기하게 쳐다보더라구요. 스님이랑 어떻게 그러냐면서. 그만큼 저한테 허물없이 대해주셨어요. 저한테는 아버지 같고 삼촌 같은 분이라 시즌 중에는 가끔 야구장에도 오셔서 절 응원해 주시곤 했어요.”
정관 스님은 이대호에게 명언을 남겼다. ‘야구를 몸으로 하지 말고 마음으로 하라’는 깨달음을 전하며 하산하기 전날 선물로 ‘산삼주’를 내놓았다고 한다.
“스님이 술을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어요. 아마도 선물용으로 마련해 놓으신 것 같아요. 산삼주를 스님 앞에서 몇 잔 마셨는데 두 달 만에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런지 핑 돌겠더라구요. 나중에 더덕주까지 뺏어 마시고 속세로 내려왔죠.”
도하의 악몽
아시안게임 대표팀에서 4번 타자로 활약했던 이대호.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을 걸고 귀국해야 했던 아픔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될 것만 같다. 대만전과 일본전의 패인을 물었다. 아시안게임 이후 대표팀에 머물렀던 선수들이 모두 ‘그날의 일’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어 이대호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엄청 심했어요. 첫 경기가 결승전이나 마찬가지였잖아요. 그 한 게임으로 인해 금메달의 향방이 갈리다보니 그에 대한 부담이 발목을 잡은 것 같아요. 어떤 분은 선수들이 자만하고 훈련을 게을리했다고 뭐라 하시는데 모두가 병역면제 혜택을 눈꼽아 기다리고 있는 마당에 그런 아마추어 정신으로 게임에 임하는 선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대호의 흥분 지수가 점차 올라갔다. 대표팀 4번 타자…. 청소년 대표팀 이후 처음 경험한 국가대표팀에서 4번 타자라는 중책을 맡은 이대호는 남다른 사명감에 불탈 수밖에 없었다.
“(이)승엽이 형이 WBC대회에서 4번 타자를 맡으셨잖아요. 욕 먹지 않고 승엽이 형이랑 비교당하지 않으려면 죽기 살기로 덤벼들어야 했어요. 어깨를 다쳤는데 내색하면 핑계댄다고 뭐라고 할까봐 아프다는 말도 못했죠. 선수들한테도 아시안게임은 ‘악몽’이었어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대회예요.”
인생의 위기
이대호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는 집을 나가는 바람에 형 차호 씨와 함께 할머니 품에서 성장했다. 따라서 이대호한테 할머니는 부모 이상의 존재였다. 시장에서 된장 장사를 하며 두 손자들을 키운 할머니는 이대호가 고2 때 세상을 떠났다.
▲ 이대호는 시즌 중 최고의 거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류현진에 밀려 MVP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사진제공 =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왼쪽),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장면.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어머니를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대호가 단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연락 안합니다. 아니 찾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차라리 안 계시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 편합니다. 연락 온 적은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만나기 싫다고 했습니다. 그 분도 가정을 꾸렸고 아이들도 있는데 굳이 절 만나서 뭐 하시겠어요. 저희를 잊고 행복하게 사시라고만 말씀드렸어요.”
야구를 하면서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참으로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고등학교 시절, 어느 학부모는 회비도 못 내고 부모도 찾지 않는 이대호에게 대놓고 싫은 소리를 퍼부은 적도 있었단다. 고아나 다름없는 생활 속에서 이대호는 눈칫밥만 늘었고 지금도 사람 표정 변화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정도로 눈치가 빠르다며 헛헛한 웃음을 짓는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 정에 굶주린 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저한테 잘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쉽게 마음을 주곤 했죠. 지금은 부모의 부재가 아쉽지 않아요. 형도 있고 또 사랑하는 여자 친구도 있으니까요.”
서재응과 즉석 통화
이대호의 단골집인 부산 장산역 부근의 한 고깃집에서 항정살을 안주삼아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에 이대호가 플로리다에서 우연히 만났던 서재응과의 ‘찐한’ 추억에 대해 얘기하길래 서재응과 전화 연결을 시켜줬다. 이대호가 서재응에게 던진 멘트들이 재밌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제가 뭘 ‘생깠다’구요? 형님이 ‘생깠으면서’. 하하 무슨 유명 스타라고 전화를 사서함으로 잠가놓으시고 그럽니까? 술요? (기자를 쳐다보며) 예. 저보다 잘 하시는 것 같습니더. 조심하라구요? 오늘 뵈니까 제가 먼저 도망갈 것 같습니더. 걱정마이소. 함 뵈입시더. 예. 형님 들어가이소.”
플로리다 교육 캠프가 끝난 후 서재응이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서재응과 이대호 외 4명의 선수들은 욕조에다 맥주 100병과 양주 2병을 들이붓고 얼음을 넣어서 퍼 마셨다고 한다. 모든 술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서재응이 이대호에게 한 말, “대호야, 내가 너처럼 술 잘 마시는 놈은 처음 봤다!!”
‘귀엽다’는 말이 ‘야구 못한다’는 말보다 더 듣기 싫다는 이대호. 내년 시즌 팀이 4강에만 오르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목 놓아 외치는 그는 내년 연봉에 대해 잔뜩 기대를 부풀리고 있었다.
“이상한 게 있어요. 김동진 운영팀장님(연봉 협상 담당자)이 12월만 되면 선수들 주위에 안 나타나세요. 평소에는 맨날 웃고 다니시는 분인데 협상 테이블에만 앉으면 인상을 쓰시거든요. 잘 풀어봐야죠. 제가 어린시절 꿈꿔왔던 롯데 자이언츠에서 좋은 대우 받고 더 좋은 성적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