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제1회 응씨배에서 우승컵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조훈현이 바둑인으로는 처음으로 김포공항에서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응씨배는 세계바둑대회의 효시라 할 수 있는 기전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벌어지던 해 대만의 사업가 고(故) 잉창치(應昌期) 선생이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우승상금 40만 달러를 내걸고 세계바둑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현대바둑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일본은 1등 자리를 빼앗길 새라 부랴부랴 응씨배보다 앞선 4월 후지쓰배를 개최한다. 뒤이어 한국에서도 삼성화재배, LG배가 잇달아 창설돼 본격적인 세계기전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응씨배 초대 우승자는 조훈현이었다. 그는 결승전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라던 녜웨이핑과 피를 말리는 사투 끝에 3 대 2 역전승을 거뒀다. 하지만 당시 바둑 변방이었던 한국은 생각지 못한 수모를 겪는다. 주최측은 총 16명의 각국 기사를 국적별로 초청했는데 한국 몫은 달랑 2장이었다. 조훈현과 조치훈. 하지만 조치훈은 일본기원에 적을 두고 있었으므로 실제 한국 몫은 1장. 한국바둑은 한참 아래라는 뜻이었다. 굴욕적인 조건이어서 대회 보이콧 얘기까지 나왔지만 결국 조훈현 9단이 단기필마로 출전했던 것이다.
조훈현이 제1회 응씨배에서 선보인 무용(武勇)은 지금도 한국바둑, 아니 세계 바둑사에 전설로 전해진다. 제1회 응씨배가 끝난 직후 중국 언론에 실린 내용 하나를 소개한다.
‘중국바둑 역사상 1988년 8월 20일은 진한 글씨로 굵게 써진다. 이날 세계를 호령하는 특급 바둑 스타들이 북경에 모여 응씨배 개막식에 참가했다. 중국 바둑의 수장 진조덕은 매우 흐뭇했다. 세계 최고 규모의 바둑대회 후원자가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조덕보다 한층 더 흐뭇한 사람이 있었으니 거액을 내놓아 이번 대회를 주최한 대만 실업가 응창기 선생이었다. 참을 수 없이 기뻐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군만마를 지휘하는 원수가 투지로 끓어오르는 모습을 방불케 했다. 그는 귀를 늘어뜨린 채 주의 깊게 고수들 각각의 개막 소감을 경청했다. 열여섯 고수들이 즉석 발언을 했다. 조치훈, 가토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2회전에 진입하고 싶다고 말했고, 다케미야는 희희낙락 중국인과 일본인 누가 우승하든 마찬가지라고 자기 딴엔 번듯한 소감을 밝혔다. 대조적으로 임해봉은 이처럼 많은 고수들의 대결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한 판 한 판 두어갈 뿐이라고 느릿느릿 말했다. 고바야시 순서가 휙 지나가고…. 섭위평은 어떻게 말했을까? 그는 나름의 계산이 서 있는 듯 중국인이 제일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응창기는 박수를 연달아 쳤다. 그가 보기에 결승전은 마땅히 섭위평과 임해봉 간에 펼쳐질 것이다. 만약 진짜로 그렇게만 된다면 그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국인들의 달콤한 예상을 무너뜨린 사람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조훈현이었다. 우승컵을 안고 한국에 돌아온 조훈현은 바둑인으로는 처음으로 김포공항에서 종로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요즘 이세돌이 알파고와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국민영웅으로 떠올랐지만, 당시 조훈현의 인기는 그보다 더 위였다.
응씨배는 이후 서봉수 9단(2회), 유창혁 9단(3회), 이창호 9단(4회), 최철한 9단(6회)이 한 번씩 우승하며 한국바둑이 일약 세계바둑의 주역으로 떠오르게 한 고마운 기전이 된다.
제7회 응씨배 결승에서 박정환(왼쪽)이 판팅위에게 우승컵을 내줬다. 사진제공=한국기원
화제를 다시 올해 대회로 돌리면 관전 포인트는 중국에 넘겨준 우승컵을 탈환할 수 있느냐다. 6회 대회까지 5번 우승컵을 차지했던 한국은 지난 7회 대회에서 중국 판팅위에게 우승컵을 빼앗겼다.
이번 대회 한국은 박정환 9단이 전기 준우승자 자격으로 시드를 받은 가운데 이세돌, 박영훈, 김지석, 강동윤, 원성진, 나현 6단이 우승컵에 도전한다. 응씨배 우승 계보는 고스란히 한국바둑 일인자 계보와 일치하는데 이번에도 과연 이세돌 또는 박정환 중 한 명에게 이어질지 주목된다.
이세돌은 알파고와의 대결 이후 다음 목표로 응씨배 우승을 꼽았다. “응씨배는 꼭 우승하고 싶은 기전이었는데 그동안 뜻대로 안 됐다. 이번에도 놓친다면 아마 다음엔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우승컵에 도전해보겠다”고 말했다.
지난 대회에서 준우승에 머문 박정환도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다. 전기 준우승 자격으로 곧장 16강에 진입한 박정환은 대진운만 따라준다면 충분히 우승을 욕심낼 만하다.
한편 응씨배는 올해부터 제한시간이 기존 3시간 30분에서 3시간으로 30분 줄었고, 초읽기 대신 주어지는 벌점도 시간 초과 시 20분당 2집씩 공제(총 2회 가능)로 변경됐다. 전기 대회까지는 제한시간을 모두 사용하면 35분당 2점의 벌점이 주어졌고 총 3회까지 시간 연장(3회 초과하면 시간패)이 가능했었다.
응씨배는 대회 창시자인 잉창치 선생이 고안한 응씨룰을 사용한다. ‘전만법(塡滿法)’이라고도 불리는 응씨룰은 집이 아닌 점(點)으로 승부를 가리며 덤은 8점(7집반)이다. 응씨배 우승상금은 단일 대회로는 최고 액수인 40만 달러(한화 약 4억 6000만 원)이지만, 30년 전 상금이 한 번도 오르지 않고 그대로인 것은 아쉬운 일이다.
유경춘 객원기자
알파고 때문에? 세계대회 창설 러시 또 하나의 대형 세계대회가 탄생한다. 중국의 에너지 그룹 신아오(新奧)가 후원하는 신아오배 세계바둑오픈전이 창설됐다. 제1회 신아오배 세계바둑오픈전은 5월 24일부터 베이징 중국기원에서 통합예선을 시작으로 막이 오른다. 신아오배는 통합예선과 시드를 부여받은 64명이 본선 토너먼트를 벌여 결승5번기로 초대 우승자를 확정짓는다. 본선 제한시간은 각자 2시간 30분에 1분 초읽기 5회가 주어진다. 우승상금은 중국 돈 220만 위안(한화 약 3억 9000만 원)으로 한국의 LG배나 삼성화재배(3억 원)보다 많다. 한국에서는 규정에 따라 세계대회 타이틀 홀더 강동윤(LG배)과 랭킹1위 박정환이 자동출전하고 국가대표 상비군에서 신진서가 선발됐다. 그 외의 기사들은 중국에서 열리는 통합예선을 뚫어야만 본선에 오를 수 있다. 최근 중국에서는 세계대회 창설이 줄을 잇고 있다. 현재 중국 주최 세계대회는 춘란배, 백령배, 몽백합배, 이민배, 궁륭산병성배, 황룡사배, 화정차업배, 마인드게임즈 등 열거하기에도 숨찰 지경. 한편 한국에서도 뒤질세라 모 기업이 조만간 세계대회를 창설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알파고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