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장’의 반열에 악조건 속에 있던 팀을 혹독한 훈련으로 재탄생시켜 우승까지 이끈 전창진 감독.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스트레스가 쌓이면 말로 푼다는 전 감독. 알면 알수록 보스 기질, 남자다운 매력, 사람을 다룰 줄 아는 지혜에 흠뻑 빠져들게 되는 그와 우승 직후 감격에 겨운 인터뷰를 나눴다.
::우승 키워드=김주성
“챔피언결정전에서 김주성은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원래 4쿼터 들어가면 체력적으로 문제가 생기는데 정신력 때문인지 겨울 훈련 때문인지 용병들을 데리고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웃으면서) 주성이가 선수들 전체 연봉의 40%에 해당하는 빅스타인데 이번엔 몸값 이상을 소화해냈다. 스타라고 우쭐대지 않고 선수들과 동화돼서 팀 살림살이를 이끈 덕분에 우리가 우승할 수 있었다. 5차전에서 트리플크라운까지 달성했다. 우승도 하고 결혼도 하고, 하여튼 주성이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것 같다.”
::좌 동희, 우 승기
“김승기 코치는 막내라 아직 배우는 단계지만 강동희 코치는 솔직히 감독급이다. 지금도 다른 팀에서 자리가 빌 때마다 호시탐탐 강 코치에게 ‘콜’을 보낸다. 그러나 동희가 스타플레이어 출신이기 때문에 난 강 코치를 오랫동안 농구판에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래서 아직은 감독 자리보단 코치 수업을 더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우승에 강 코치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워낙 큰 경기를 많이 치른 선수 출신이라 단기전에서 강 코치의 반짝거리는 아이디어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특히 강·김 코치는 나에겐 없어선 안 될 존재다. 종종 술자리에서 술을 못하는 날 대신해 ‘알아서’ 마셔주기 때문이다. ‘좌 동희, 우 승기’만 봐도 절로 배가 부르다.”
::구단주에 자극받아 ‘열공’
“이건 언론에 처음 공개하는 건데…. 지난해 플레이오프에 실패한 뒤 회사에 불려 들어갔다. 농구인들은 우리 팀 성적에 대해 ‘그래도 그 멤버로 잘했다’는 반응이었지만 성적에 민감한 회사 측에선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날 불러놓고 상당히 서운한 감정을 표출했다. 어느 면에선 회사 측 입장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선수 구성원들은 살피지 않고 오로지 성적 내기만을 바랐던 부분에 대해선 굉장히 속상했다. 감독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오기를 부렸다. 어디 두고 보자. 전창진이 지도자로서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팀을 새롭게 만들어보자고 결심했다. 선수들을 불러 놓고 부탁했다. 아니 사정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연습밖에 없다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혹독한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지금 다시 그 ‘짓’ 하라고 한다면 선수뿐만 아니라 내가 도망갈 것 같다(웃음).”
▲ 전창진 감독이 챔프전에서 우승한 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이번 시즌을 치르며 가장 값진 수확이라면 벤치 신세였던 선수들이 대거 주전급으로 성장한 부분이다. 1, 2라운드 때는 상대팀에서 우리 애들을 너무 쉽게 봤다. 덕분에 우리가 승수를 많이 쌓을 수 있었지만. 표명일 강대협 손규완 등은 정말 우리 팀의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특히 올시즌 우리와 인연을 맺은 신인 (이)광재는 비록 신인왕을 놓쳐 아쉽긴 했어도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에서 자신의 몫을 120% 이상 소화해 냈다. ‘샛별’ 광재가 있었기에 ‘큰별’ (김)주성이가 마음껏 플레이를 펼쳐갈 수 있었다. (이)세범이도 보조 역할에 충실하며 선수단에 녹아들었고 (손)규완이는 주장으로 선수들을 훌륭히 이끌어갔다. 특히 (양)경민이도 꾸준히 자기 운동을 해준 부분이 올시즌 우승의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양경민을 챙기는 이유
“경민이 얘기를 하려면 정말 할 말이 많다. 좋지 않은 사건(2006년 본인출전경기의 토토를 구입해 벌금형을 받은 사건)에 연루돼 자신은 물론 팀 이미지까지 구긴 적도 있지만 그 애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나 과정들을 알게 되면 무조건 경민이를 향해 비난만 퍼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엔 나도 ‘패죽일 놈’ 운운하며 경민이에 대해 엄청난 실망감을 내비쳤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들을 살펴보면 무조건 경민이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아닌가. 솔직히 내가 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경민이의 진실을 밝혀주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부턴가 웃음을 잃은 경민이가 꼭 한 번 멋지게 재기해서 활짝 웃는 모습을 찾은 뒤 코트를 떠났으면 좋겠다. 경민이는 우리 팀이 어려울 때 의리를 지켜줬다. 그 수준의 선수들이 FA로 풀린 후 40억~50억 원씩 챙길 때 경민이는 자신을 대우해주는 다른 팀의 ‘러브콜’을 거절하고 원주에 남았다. 아니 날 위해 팀에 남기로 한 것이다. 올시즌 전에 다른 팀에서 경민이를 달라고 했지만 내가 안 보냈다. 다른 선수들은 불편했을지 몰라도 난 내 울타리 안에서 내가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 지켜주고 싶었고 그동안 그 친구가 당한 부당한 일들의 앙금들을 이해시켜주고 씻겨내주고 싶었다.”
::허재와 불편했다고?
“허재가 은퇴할 무렵, 나랑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가 돌았다. 전혀 사실무근이다. 내가 삼성에서 나래 코치로 자리를 옮긴 배경에는 허재의 권유가 가장 컸다. 지금은 감독님이지만 여전히 형, 동생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감독으로 만난 허재는 뭐랄까…, 좀 조급해 보였다. 감독 첫 해에 4강에 오르기도 했고 올시즌 정규리그 2위에 오르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허 감독 입장에선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언론은 스타급 감독들한테 아주 예민한 편이다. 누구보다 그 부분을 잘 아는 허 감독으로선 상당히 오랜 시간 고민과 번민의 밤을 보냈을 것이다. 만약 코치를 거쳐 감독에 올랐다면 조금은 단련이 됐겠지만 바로 감독을 맡다보니 시행착오가 많을 수밖에 없지 않나. 난 허재가 TG 삼보에서 은퇴했을 때 유학을 다녀오면 내 자리를 양보해줄 생각이었다. 허재 은퇴 후에는 원주 감독 자리가 전창진이 아닌 허재의 몫이라고 각인시켜왔기 때문이다.”
▲ 지난 4월 25일 원주 동부가 2007-2008 프로 농구 챔피언결정전에서 서울 삼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 ||
“난 술 못 먹는 것에 대해 일종의 핸디캡이 있다. 술자리와 공식적인 자리에서 하는 말은 서로 다르지 않나. 그런데 술을 못 하다 보니까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렇다고 술자리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마시지 못하더라도 같이 어울려 놀다보면 술마시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다보니까 새벽이 넘어가면 술 한 잔 안 마신 나도 술 마신 듯한 취기에 빠진다. 그래서 2차, 3차를 갔다가 동이 트기 전 해장국집에 들러 같이 해장한 뒤 헤어진다. 나의 노하우는 취한 사람 이상으로 열심히 놀고 노래 부르는 거다(웃음).”
::주무에서 감독까지
“내 출신 성분은 팀 매니저다. 선수로 크게 성공했다면 과연 지금의 전창진이 있었을까? ‘때마침’ 발목 부상을 당해서 은퇴를 빨리 할 수 있었고 선수단 매니저를 맡게 되면서 구단 운영이나 살림살이에 남다른 안목을 갖게 됐다. 감독과 코치에게 말하지 못하는 부분을 내가 대신 전해 들으며 코칭스태프에게 알린 적도 있었고 선수들의 고충과 감독의 고독 등을 가까이 보고 느꼈던 부분들이 지도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 난 선수들과 대화하는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대화를 통해 마음을 열면 힘든 훈련도, 슬럼프도, 부상도, 위기도 다 넘어설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내 인생 중에서 가장 잘 한 선택이라면 부상으로 은퇴한 뒤 농구판을 떠나지 않고 팀 주무를 맡았던 일이다.”
우승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전창진 감독은 잠시 회한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TG삼보에서 동부 프로미로 ‘주인’이 바뀌는 동안 6개월가량 선수단 전체가 월급을 받지 못하고 지냈던 시간들, 은행 대출받아 선수단 운영비를 마련하며 허리띠를 졸라맸던 상황들,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당뇨병을 얻게 된 사연들, 그리고 오래 참고 노력해준 선수들 덕분에 ‘사연 많은’ 우승을 하게 되기까지….
인터뷰 말미에 전 감독은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최초 고백으로 기자를 놀라게 했다. “사실 우리 아버지가 농구 선수 출신이에요. 중앙대 출신…. 일찍 선수 생활을 접고 주유소 사업한 게 대박을 쳤어요. 어렸을 때 사립학교 다니고 기사 딸린 외제 승용차에다 강남의 대저택에서 생활할 만큼 제 유년시절은 빵빵했죠. 그러다 아버지 사업이 기울어지고 암으로 일찍 세상을 뜨시면서 돈이 없는 서러움을 깨닫게 됐어요.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이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버지 덕분에 농구선수 전창진, 농구감독 전창진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