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일 노무현 당선자가 민주당 신년하례식에서 연 설을 하고 있다. 노 당선자 뒤에 한화갑 대표의 얼굴이 희미하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밀약설의 핵심은 김 대통령이 동교동계를 해체시켜 노 당선자의 민주당 개혁을 포함한 정국 운영상 걸림돌을 제거해주는 대신 노 당선자는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대한 책임 추궁을 최소화하고 김 대통령의 퇴임 후 활동을 최대한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두 사람간에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약속이 어느 정도의 수위로 어떤 경로를 통해 이뤄졌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지난해 12월23일 대선 후 두 사람의 첫 회동에서 대강의 밑그림이 그려졌으며 이후 양측의 핵심 측근을 통해 구체적인 의견 교환이 이뤄졌고 두 사람의 2일 선언으로 밀약이 실행됐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따라서 이런 분석이 맞다면 지난 3일 두 사람의 부부만찬 회동은 밀약 실행을 축하하는 자리가 된 셈이다. 이런 분석은 대선을 눈앞에 둔 시점부터 지난해 12월22일까지만해도 노 당선자측과 청와대측간에는 상당한 긴장관계에 있었다는 정황에서 출발한다.
대선을 불과 이틀 앞둔 지난해 12월17일 오전 노 당선자는 여의도 당사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 있는 세력과 인사들은 응분의 책임을 지도록 할 것”이라며 “인사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등 국정운영과 쇄신에 장애를 가져왔던 인사. 부패와 관련있는 인사, 실정에 책임있는 인사 등은 법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당선자의 이 같은 발언은 당연히 김대중 정권하에서 권력을 휘두른 범 동교동계 인사들을 겨냥한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책임을 지는 수위가 ‘정치적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법적 차원’으로까지 나갈 수 있다고 언급한 점이다.
당시 청와대측은 대선이 임박한 상황임을 감안, 즉각적인 대응은 자제했다. 그러나 노 후보가 대선에 승리한 뒤 조순형, 신기남 의원 등 친노 강경 개혁파 23명이 지난해 12월22일 또다시 “김대중 정권의 부패와 실정에 책임이 있는 세력과 인사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노 당선자마저 “(당 개혁) 속도를 조절했으면 하고 생각하지만 (개혁의) 흐름 자체는 누가 막고 말리고 해서 될 상황이 아니다”고 이에 동조하고 나서자 청와대측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나섰다.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는 “집권여당을 함께한 처지에서 유감”이라며 “국민의 정부는 개인비리는 있었지만, 정권비리는 없었다고 자부한다. 우리가 그렇게 낙인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23일 진행된 김대통령과 노 당선자의 회동은 자연히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됐는데 김 대통령의 노 당선자에 대한 예우는 극진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 본관 현관 복도까지 나와 노 당선자를 맞았으며 엘리베이터를 탈 때도 노 당선자에게 먼저 탈 것을 권했다.
그리고 1시간30여 분간 배석자 없는 독대가 이뤄졌는데 두 사람은 대화에 집중하느라 준비된 음식을 거의 비우지 않았다. 대화를 마친 뒤 김 대통령은 역시 현관까지 노 당선자를 배웅했다.
당시 박선숙 청와대 대변인은 두 사람간의 대화와 관련, “북핵문제를 중심으로 국제 관계에 대해 주로 이야기 했으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EU 등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고 브리핑했다. 이날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당사자들 외는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날 회동 직후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가 북핵문제와 관련, 거의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대화의 상당 부분이 북핵문제에 집중된 것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김 대통령은 지난해 12월27일 오전 경기도 평택시 공군작전사령부를 방문, “북핵은 반대하지만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국제여론을 동원해 외교적으로 해결하는 원칙을 고수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노 당선자도 군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북핵문제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지만 대화로 풀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같은 달 30일에도 김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공산국가에 대해 냉전시대에도 억압과 고립화가 성공한 일이 없다”며 미국의 ‘맞춤형 대북 봉쇄’정책에 반대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 노무현 당선자도 대통령직 인수위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미국의 맞춤형 봉쇄정책이 북한을 제어하거나 굴복시키는데 효과가 있는 수단인지에 관해 회의적으로 생각한다”며 김대통령의 입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북핵 문제 못지 않게 주목되는 부분은 노 당선자의 당 개혁에 대한 입장이 이날 이후 뚜렷한 변화조짐을 보였다는 점이다. 노 당선자는 회동 바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24일 신계륜 비서실장을 통해 당 개혁과 관련, 특정 주장에 대해 지지하지 않는다는 ‘노심(盧心)불관여 입장’을 천명했다.
또 같은 날 동교동계의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이 자신이 연루된 ‘진승현 게이트’ 관련 재판이 끝나면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는 입장을 측근을 통해 밝혔다. 이 즈음 동교동계 신주류 핵심인 한화갑 대표도 차기 당권 불출마 의사를 흘리기 시작했다.
27일에는 노 당선자의 정치적 후견인인 김원기 고문이 당 개혁과 관련, “제도와 사람 어느 한쪽만 바꿔선 안된다”며 “그러나 ‘청산’은 과한 표현이지만 시대가 바뀌면 시대에 맞는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 인적 청산이 당초 노 당선자나 친노 강경 개혁파가 주장한 ‘정치적 법적 책임추궁’이 아니라 ‘민주당 지도부 교체’ 수준에 머물 것임을 시사했다.
이 같은 입장은 12월31일 노 당선자의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보다 뚜렷해졌다. 노 당선자는 이날 간담회에서 “민주당의 인적청산을 주장한 적도 없고 원하지도 않는다. 인적 청산이 아니라 새정치를 주도할 새로운 정치세력이 주도해 개혁해 나가면 인적청산 대상이니 아니니 하는 사람들도 다 개혁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말해 처음으로 인적청산 반대 입장을 천명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 2일 두 사람은 ‘동교동계 해체’와 ‘인적청산 반대’ 입장을 공식 천명함으로써 정권 인수인계를 둘러싸고 양자간의 핵심 사안인 동교동계 문제에 대해 일치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날 노 당선자는 오전 10시 중앙당 대강당에서 열린 신년하례식에서 “신문에 자꾸 인적청산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당에서 개혁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용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임있는 사람들이 좀 2선으로 물러나 달라는 요구가 있으니까 그것을 표현하기가 마땅지 않아 인적청산이라고 쓰는 모양인데 저는 그 기사를 볼 때마다 불만스럽다. 우리당에서 인적청산 같은 것이 논의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하다”고 말했다.
불과 15일전에 정치적•법적 책임 추궁을 거론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표현이다. 거의 같은 시간 김 대통령은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 “민주당 내 당권경쟁이 본격화되면 동교동계라는 용어가 다시 거론될 가능성이 있는데 동교동계라는 말이 나와서도 안되고 동교동계라는 모임이 있어서도 안되며 이를 이용해서도 안된다”는 뜻을 밝혔다.
김 대통령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이 같은 뜻을 박 실장을 통해 민주당 인사들에게 전달했음을 공개했다. 또 박 실장은 “물론 김 대통령은 과거 동지들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분들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마치 노 당선자가 ‘동교동계도 협조하면 인적 청산 대상으로 삼지 않고 함께 잘 지낼 수 있다’고 약속하자 김 대통령은 ‘내가 동교동계 의원들에게 계파를 해체하고 노 당선자를 돕는 것이 서로 잘되는 길이다는 점을 잘 설득했다’고 화답하는 것처럼 들린다.
이처럼 그간의 경위나 두사람의 발언내용은 ‘짜고 치더라도 쉽지 않는’ 수준의 교감 가능성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향후 정치적 상황을 짚어보면 밀약 수준의 교감 필요성은 쉽게 드러난다. 김 대통령은 재임중 두 아들이 비리 혐의로 사법처리되는 등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권재창출에 성공한 만큼 역대 대통령과 달리 퇴임 후에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위나 활동을 보장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핵 문제, 중국 급성장, 일본 재무장 등 첨예한 사안들이 중첩돼 있는 동북아시아 국제정치 무대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한국의 전직 대통령은 미국의 카터 전 대통령 못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선을 전후한 노 당선자나 민주당 내 강경 개혁파 의원들의 주장처럼 김대중 정권의 부패 및 실정에 대한 책임추궁과 이에 따른 인적청산론이 진행된다면 이런 구상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다.
노 당선자가 강경 개혁파의 이 같은 주장에 힘을 실어줄 경우 40년 정치적 동지인 동교동계 인사들은 차기 정권에서 ‘사정의 칼날’을 맞을 가능성이 높고 그 여파가 김 대통령에게도 미쳐 역대 대통령처럼 국제정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국내에서도 숨을 죽이고 지내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 당선자의 경우에도 현재로서는 칼 자루를 쥐고 있어 김 대통령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정치적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노 당선자는 당선 이후 당내에는 정당개혁을 주문했고 정치권 전체를 향해서는 선거법 개정, 헌법개정, ‘빅4’ 인사청문회 등 무수한 공약을 쏟아내놓고 있다.
지금은 대선 승리의 기세가 유지되고 있고 한나라당은 내부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어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공세를 전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 당선자는 역대 정권 중 권력 기반이 가장 취약한 정권일 가능성이 높다.
노 당선자는 3김만큼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갖고 있지 못하다. 북핵문제 등으로 정치적 환경은 대단히 불리한 편이다. 북핵문제가 노 당선자 주장대로 해결되지 않거나 악화될 경우 정권초기부터 보수진영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수도 있다.
더 큰 문제는 야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과반수 의석을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한나라당이 마음만 먹으면 헌법 개정과 대통령 탄핵소추 정도를 제외하고는 국회가 갖는 모든 권한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현재 박관용 국회의장은 비록 당적을 이탈했지만 한나라당 출신이다.
결국 이런 정치적 상황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간의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의 교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이에 따라 향후 동교동계는 일단 계파를 해체하고 당의 2선으로 물러나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노 당선자측의 개혁방안에 협조할 것으로 보인다.
한화갑 대표가 이미 차기 당권 도전을 포기한데 이어 한광옥, 정균환 최고위원 등도 당권 도전을 포기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에 대해 노 당선자는 단기적으로는 인적청산론을 재론하지 않고 집권 이후에도 김대중 정권하의 부정부패 청산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일 수 있다.
또 17대 총선에서 동교동계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김 대통령에 대해서는 북핵문제를 포함한 대북, 대중국 국제문제와 관련, 적극적으로 자문을 요청하거나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문제 해결에 직접 나서도록 요청하는 등 김 대통령이 주창한 ‘햇볕정책’을 마무리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교감은 어디까지나 당 개혁이 진행되고 김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앉아있을 오는 2월25일까지만 실천이 담보된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김대통령이 집권말기 대규모 사면조치를 취하고 공정위의 언론사 부당내부거래 과징금 부과를 취소 결정에 대해 노 당선자측에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특히 노 당선자 취임 이후 김 대통령 재임중 부정부패 및 비리 혐의가 폭로되거나 야당의 대여공세가 강화될 경우 ‘사정의 칼’을 먼저 동교동계로 돌릴 가능성은 상존한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