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헌 제안과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1일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회동을 가졌다. 초청을 받은 야 4당은 개헌론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오찬모임에 참석을 거부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지난 9일 노 대통령의 대국민 특별담화에서 대통령 4년 연임 개헌안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할 때만 하더라도 “정계개편 논의에 찬물을 끼얹었다”라는 반응이 대세였다. 선도탈당을 주장하던 통합 강경파의 움직임도 주춤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이 민심의 역풍을 맞고,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한나라당이 무대응으로 일관하자 오히려 개헌 논의가 동력을 잃고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잠시 속도 조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던 통합 논의도 물밑에서 다시 가열되고 있다.
지난 6일 탈당을 선언했던 염동연 의원은 12일 다시 “(탈당 의사는) 국민에게 한 약속”이라며 “전당대회 준비위에서 당 해체선언 등을 의제설정하지 않을 경우 탈당하려 한다”며 다시 선도탈당론의 불씨를 되살렸다. 이계안 의원 역시 “대통령의 개헌안 제시 후 내 입장이 변한 적 없다. 내가 가진 기득권이 당원과 의원 두 가지가 있다. 때가 되면 행동하겠다”라고 밝혔다. 염 의원 또 “많은 의원들이 탈당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라고 말해 연쇄탈당의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낙순, 임종석, 조배숙 의원 등도 탈당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개헌 논의가 주춤한 사이 통합신당의 논의가 더욱 거세지고 있는 형국이다.
이미 당 지도부도 “개헌과 통합 논의는 별개 사안이므로 두 사안을 병행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통합파인 최재천 의원도 “이미 노 대통령은 통합신당에 상수가 아니다. 신당 논의는 개헌 문제와 별개이고 개헌이 신당 논의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고 잘라 말했다.
노 대통령의 원래 의도대로라면 개헌은 열린우리당 내의 통합 신당 논의를 모두 멈추게 하고 개헌이라는 기치 아래 모든 세력이 뭉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동영 전 의장은 “개헌에 찬성하는 축이 범여권의 축과 겹치기 때문에 개헌 논의가 통합의 틀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한 중진 의원도 “개헌을 정계개편에 부정적인 것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통령이 시간을 벌게 해준 측면도 있다”며 “개헌 논의 뒤에서 각 정파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정계개편을 위한 힘을 비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입장에서는 개헌 카드는 정계개편을 오히려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형국이다. 원래 열린우리당 내에는 신당파와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한 당 사수파가 싸워왔다. 여기에 신당파 내에서도 강봉균 정책위의장 등 실용파와 김근태 의장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가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개헌 찬성파와 반대파까지 뒤섞이게 됐다. 한마디로 신당파이며 실용파이지만 개헌반대파인 경우가 나타나는 상황이다.
그동안 통합을 주장해온 김근태 의장 측도 입장이 난처해지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8일 김 의장은 “정권재창출을 위해 노 대통령이 대통합 신당을 추진하는 과정에 힘과 지원을 부탁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통합신당 논의의 주도권은 당이 가져야한다”는 입장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다. 이 같은 김 의장의 발언을 두고 주변에서는 “김 의장과 노 대통령이 손잡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던진바 있다. 김 의장 측은 “입장이 바뀐 것은 아니다. 김 의장이 원래 대통령을 배제하자고 한 적이 없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중도파의 한 중진 의원 측은 “김근태계가 친노 및 당 사수파와 정체성에서 가까운 게 사실이고 김 의장이 신당 주도권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당 사수파와 연대할 개연성은 있다”라고 설명했다.
▲ 탈당을 선언한 염동연 의원과 탈당을 고민하고 있는 조배숙,임종석 의원(오른쪽부터). | ||
여기에 일부에서는 개헌정국이 오히려 열린우리당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갈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미래상을 그리는 의원들도 있다. 다행히 노 대통령이 11일 기자회견에서 임기단축이나 탈당 등을 부인했지만 몇몇 의원들은 “사정이 달라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 한다. 실제로 조기 하야는 현재 뚜렷한 대선주자가 없는 열린우리당에게도 엄청난 부담이다. 탈당도 당사수파에게는 악몽이다. 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고, 국회에서 표결을 할 때까지 정치적 부담도 열린우리당이 고스란히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개헌론이 일단 야당의 반대와 국민들의 외면으로 풀죽은 모습을 보임에 따라 신당파의 움직임이 다시 활발해 지고 있으나 사정은 더욱 복잡해진 듯이 보인다. 지난 12일 정계개편을 주도해온 당내 5개 정파 모임은 이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통합신당이라는 명분 아래 연대해 온 희망21, 실사구시, 안개모, 국민의 길, 민평련 등 5개 모임이 입장 차이를 보인 것이다. 김근태 계열인 민평련 대표로 모임에 참석해 온 정봉주 의원이 “이들 모임에 당분간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가운데 나머지 4개 그룹은 “노 대통령의 개헌제안이 전정성을 충분히 전달하고 성공적으로 국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당적의 정리를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의견을 모았다”며 대통령의 탈당을 요구했다. 명목은 개헌의 명분을 위해서라지만 통합신당과정에서 걸림돌이 되는 노 대통령에게 비켜달라는 얘기다.
앞서 논란이 돼 온 ‘김근태-정동영 2선 후퇴론’도 재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앞서 실사구시 모임을 이끌고 있는 강봉균 의원은 김근태 의장을 겨냥해 좌파 운운하며 정책과 노선의 갈등을 유발했고 김 의장도 ‘짝퉁 한나라당’이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가했다.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가운데 열린우리당이 개헌 지지로 일치단결할 가능성은 점차 적어지고 있다. 이미 열린우리당 내부에서도 천정배 의원을 비롯한 일부 의원들이 개헌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으면 임종인 의원 등은 노골적으로 개헌을 반대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좌파로 불려진 김근태계가 개헌을 매개로 당 사수파와 손을 잡는다면 당내 사정은 훨씬 복잡해진다.
현재 당내에서는 선도탈당을 잠재우기 위해 전당대회 준비위에서 타협점을 찾고 있다. 전당대회 준비위 대변인인 오영식 의원은 “각 정파별로 그간의 오해도 많이 풀었고 이해를 높이고 있다. 원칙에 따라 준비위 내에서 전당대회를 잘 준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대 준비위에 참석하는 한 관계자는 “통합신당파와 당 사수파 간에 의견이 선명하게 갈려 좀처럼 결론내리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라고 전했다. 개헌론이 더 사그러들면 탈당 러시는 시한폭탄처럼 언제라도 터질 것 같은 태세다. 이 시한폭탄을 터뜨릴 뇌관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개헌 논의가 오히려 신당 논의 뒤로 밀리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열린우리당 기간당원들이 제기한 “기간당원제 폐지를 골자로 한 당헌개정이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이다. 사건을 맡은 서울 남부지법은 지난 11일 일단 판단을 유보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결에 따라 통합신당 논의는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될 수도 있다. 또한 전당대회 준비위 활동기간이 만료되는 오는 20일 준비위가 어떤 결과를 내놓느냐에 따라 당이 쪼개질 수 도 있다. 염동연 의원 등 통합 강경파들이 이날을 데드라인으로 잡고 있다. 전당대회 준비위의 최대 쟁점인 의제 설정과 관련해 통합신당파는 당 해체를 통해 통합신당을 결의하자는 입장이고 당 사수파는 당해체를 선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대통합을 결의하는 수준으로 하자고 맞서고 있다. 지금 상황으로는 사수파와 통합파 간 합의가 불가능해 보인다. 전당대회 준비위가 20일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탈당 도미노가 이어질 것이다.
또한 친노 사수파의 입장에서도 혹시라도 노 대통령이 전당대회 전 탈당을 결심한다면 마냥 당 사수만을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다. 친노 사수파는 일단 대통령의 개헌 추진에 힘을 싣고 대통령 탈당에 대비해 전략변화를 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통령 탈당으로 세 위축을 막기 위해 친노세력 결집을 극대화할 방안을 마련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계개편의 소용돌이 속에 개헌이라는 빅카드까지 맞물려 여권의 통합신당을 둘러싼 통합파와 사수파의 충돌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