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일체 대응을 하지 않던 박근혜 대통령이 철저한 검찰 수사를 지시하고 나섰지만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질지에 대해선 회의적 시선이 팽배하다. 입을 굳게 닫고 있는 최 씨 역시 딸 정유라 씨와 함께 독일로 출국한 뒤 행적이 묘연한 상태다.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 씨는 과연 누구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라는 의혹을 받고 있는 정윤회 씨(왼쪽)와 전 부인 최순실 씨가 2013년 7월 19일 경기도 과천 경마공원 관중석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제공=한겨레
최순실 씨가 박근혜 대통령과 연을 맺게 된 것은 부친인 고 최태민 목사의 소개로 인해서였다. 최 씨는 최 목사의 다섯 번째 부인 딸이다. 최 목사는 육영수 여사 죽음으로 상심이 컸던 박 대통령에게 위로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항간엔 최 목사가 포교 활동을 목적으로 박 대통령과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90년 <여성중앙>과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은 최 목사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현몽(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남) 운운하는 건 없는 얘기다. (최 목사의 편지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 꿋꿋이 잘하라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최 목사는 내가 처음 청와대로 초빙했다.”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난 최 목사는 ‘구국 선교’를 역설했다. 그 후 박 대통령 후원을 받아 ‘대한구국선교회’를 설립했다. 최 목사는 선교회 총재로 취임했고, 박 대통령은 명예 총재를 맡았다. 선교회는 1976년엔 ‘구국봉사단’, 1979년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했다.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대통령은 여동생처럼 자신을 잘 따르던 최순실 씨와 상당히 가깝게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1956년생인 최 씨는 박 대통령보다 네 살 어리다. 박 대통령이 최 씨를 청와대로 불러 자주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최 씨는 박 대통령과 최 목사가 1977년부터 전국적으로 펼친 ‘새마음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박 대통령은 새마음봉사단 총재를, 최 씨는 새마음 대학생 총연합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다음은 1979년 2월 6일자 <동아일보> 보도다. “‘말보다 실천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구국여성봉사단 산하 새마음 대학생 연합회(회장 최순실, 단국대 4년)가 벌이고 있는 불우 청소년 선도 교육 사업이 올해엔 전국으로 퍼져 나가게 됐다.”
여러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새마음봉사단이 해체되기 전까지 박 대통령은 수많은 행사에 참가해 새마음 대학생 연합회 회장이었던 최 씨와 환담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한 뒤 새마음봉사단은 1980년 11월 22일 자진 해산했다.
그 후 최 씨 자취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 씨는 단국대에서 교육 관련 석사 학위를 받고, 20대 중반 결혼했지만 곧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남 압구정동에서 초이유치원을 운영했던 최 씨는 부친의 비서였던 정윤회 씨를 만나 1995년 재혼했다. 정 씨는 1955년생으로 최 씨보다 한 살 많다.
최 씨가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것은 지난 1990년 육영재단 운영권을 둘러싼 분쟁에서다. 당시 박 대통령 동생 박근령 씨 지지자들 모임으로 알려진 ‘숭모회’ 관계자들은 이사장이던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했고, 최 목사 일가가 재단 업무에 지나치게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육영재단 직원들은 재단 산하 어린이회관이 최 씨가 운영하던 유치원에 특혜를 줬다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90년 11월 17일자 <경향신문>은 “최 목사가 재단직원들에게 반감을 산 것은 현재는 폐간된 <어깨동무> <꿈나라> 등 어린이 잡지 편집에 딸 순실 씨(당시 38세)가 관여하는 등 육영이 목적인 어린이회관을 수익사업체로 전환시키려 한 데서 비롯됐다”고 보도했다. 이처럼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은 결국 이사장직을 내놓았다.
박 대통령 동생들은 1990년 8월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게 A4용지 12매 분량으로 “저희 언니(박근혜)와 저희들을 최태민 목사의 손아귀에서 건져 달라”는 절박한 내용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여기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축재 행위가 폭로될까봐 계속해 저희 언니를 방패막이로 삼아 왔다. (최 목사는) 유족이 핵심이 된 각종 육영사업, 장학재단, 문화재단 등 추모사업체에 깊숙이 관여해 회계장부를 교묘한 수단으로 조작하여 많은 재산을 착취했다. 지금은 서울 강남 및 전국에 걸쳐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90년 최 씨는 <여성중앙>을 통해 심경을 토로했다. 당시 취재기자는 ‘사석에서 어렵게 만난 최 목사의 딸 최순실’이라며 ‘최 씨는 소문에 대해 입을 여는 것조차 불결하게 여기고 있었다’고 분위기를 설명하고 있다. 기자가 “그동안 왜 가만히 있었느냐”고 묻자 최 씨는 “정면에 나서서 떠들면 파문만 커지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 유가족에게 누를 끼치게 된다는 것이 아버지(최 목사)의 생각”이라고 답했다.
이어 기자가 “그동안 박근혜 씨와 관계를 놓고 비판도 많았는데 계속 함께 일을 해온 까닭은 뭐냐”고 묻자 최 씨는 “비판적인 말, 뜬소문이 돌 때면 가족들도 아버지께 그만두라고 권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성격 자체가 일단 한번 시작하면 중지하지 않는다. 근혜 씨를 도왔는데 이제 와서 중지하면 곧 배신행위라며 지속해왔다. 근혜 씨에게 정신적으로 용기를 북돋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나마 몇 달 전부터는 그것도 끝났다”고 밝혔다.
육영재단 사태 후 최 씨의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다만, 지난 2006년 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선거 유세 도중 괴한으로부터 피습을 받아 입원을 했을 때 최 씨가 박 대통령 병실로 찾아 와 극진히 간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최 씨를 그때 처음 봤다. 최 씨가 박 대통령을 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떠올렸다.
최 씨는 2007년과 2012년 대선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름이 거론됐다. 이른바 박 대통령 비선 라인의 핵심으로 거론됐던 것이다. 전남편 정윤회 씨가 ‘막후 비서실장’으로 통했지만 핵심 친박 의원들 사이에선 최 씨도 박 대통령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이 공공연히 돌았다. 다음은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한 전직 의원의 말이다.
“박 대통령은 중요한 의사 결정을 공식 라인이 아닌 외부의 특정 팀과 논의해 결정하곤 했다. 내부에서 정해진 사안이 갑자기 뒤바뀐 적이 여러 번 있어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 비선 팀이 바로 정윤회-최순실 부부라는 게 정설이었다. 지켜본 바로는 정 씨가 주로 업무와 관련이 있다면, 최 씨는 그보다 훨씬 인간적으로 가까워 보였다. 정 씨는 박 대통령을 상관처럼 다소 어려워했지만, 최 씨는 ‘언니’처럼 대하는 걸 봤다. 진정한 막후 실력자는 정 씨가 아니라 최 씨였던 것 같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김경민 기자 merucr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