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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드컵의 ‘최고 수혜자’ 정몽준 의원이 6월10일 미국전이 열린 대구월드컵 경기장에서 히딩크 감독과 대화하고 있다. | ||
태극전사들이 창조해낸 새 역사는 전국을 붉은 물결로 만든 것으로 모자라 정치권의 지형마저 바꿔놓았다. 태극전사들의 선전 속에 유럽 강호들이 짐을 싸는 동안 정치권에선 새로운 대권 후보의 조기 가시화, 대통령 친인척 비리 논란 무마, 그리고 각 당의 표정 변화 등이 이뤄졌다. 짧은 시간이었건만 축구공 하나가 어느 축구해설위원의 말처럼 각본 없는 정치드라마를 만든 셈이다.
경기 외적인 효과까지 감안하면 이번 한일월드컵 최고의 수혜자는 정몽준 의원이라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월드컵 최고스타는 히딩크나 안정환이 아닌 정몽준”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한국 축구행정을 총괄하고 있는 정 의원의 대권행보가 가속화될 거란 예상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월드컵이 끝난 뒤 8·8재보선 시점을 전후로 정 의원의 본격행보가 시작될 거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정 의원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대통령에 도전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라며 월드컵 이후를 염두에 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태극 전사들이 연일 유럽 강호들을 격파해 나가자 정 의원의 대권행보 역시 가속 페달을 밟게 됐다. 16강 진출을 결정지은 포르투갈전이 끝나고 정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대표선수들의 라커룸을 찾았다. 홍명보가 젊은 선수들 병역문제를 조심스레 꺼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병역 미필 대표선수 10명의 병역특례 조치가 의결됐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한 현대계열사에 정 의원 대선기획팀이 설치됐다는 설이 흘러나왔다. 정 의원측은 일단 부인했다. 하지만 정 의원의 대권 행보에 대한 측근들의 언급 횟수는 점차 늘어갔다. 정가에선 “대표선수 병역특례를 마치 정 의원이 이루어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월드컵 성공으로 정 의원측에서 종전과 다른 자신감이 엿보인다”등의 평가가 나온다.
지난 6월22일 태극전사들이 스페인을 준결승 제물로 삼은 광주월드컵경기장에 정 의원은 김 대통령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일각에선 4강 진출을 확정지은 장소가 광주라는 의미를 둔다. 광주는 노무현이란 스타를 만들어낸 고장. 새로운 ‘정풍(鄭風)’이 불 수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여기서 ‘정풍’이란 ‘정몽준 바람’을 뜻한다.
실제로 광주 스페인전을 앞두고 광주지역에선 정 의원 지지를 위한 모임이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나돈다. 정씨 성의 한 전직 의원이 만들었다는 이 모임은 기존의 정씨종친회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할 거라 전해진다. ‘이인제 회의론’과 마찬가지로 최근 노 후보에 대한 회의론이 조심스레 제기되는 실정이라 광주가 또 하나의 정치혁명을 만들 거란 설이 제기되는 것이다.
정 의원은 6월22일 스페인과의 4강전에는 언론사 편집국장들, 6월25일 독일과의 4강전에는 언론사 사장단을 초청했다고 한다. 참석자는 그다지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정치권에 대한 외연이 비교적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정 의원이 언론을 향해서도 본격 행보를 시작했다는 평가다.
월드컵 공동개최국 일본에서도 정 의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아사히신문〉은 최근 ‘정몽준 의원의 인기가 급상승하고 있으며, 대선 출마 선언을 할 경우 단숨에 태풍의 눈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정 의원이 노무현 이회창 후보를 크게 위협할 거라 진단하기도 했다. 자국의 축구협회장에 비해 국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 의원에 대한 부러움 섞인 시선이 뜨거운 관심으로 발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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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은 21일 DJ차남 김홍업씨의 검찰출두 장면. 이회창 후보 | ||
법조 출신의 정치권 인사는 “소환 3일 전후로 영장 발부가 예상됐는데 이탈리아전 다음날 홍업씨 소환이 이뤄졌다”라며 “스페인과의 경기 바로 이전에 영장이 떨어지게끔 시기가 만들어진 게 과연 우연인지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소환 이틀 만인 6월21일 홍업씨는 동생 홍걸씨와 마찬가지로 구속됐다. 한국팀이 스페인팀과 4강전을 갖기 하루 전날이었다. 홍업씨 구속 관련 보도는 ‘한국축구 월드컵 4강’이란 붉은 글씨에 가려진 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 못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나 김 대통령 3남 홍걸씨 구속 때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태극전사들의 신화창조는 민주당 내분사태 조기수습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방선거 참패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교체론까지 나돌 정도로 흉흉한 분위기를 자아냈던 민주당. 하지만 지방선거 다음날 유럽 강호 포르투갈을 침몰시키며 한국축구가 대업을 달성하자 언론은 물론 유권자들의 비난여론 역시 붉은 물결 속에 잠겨버렸다.
노 후보에 반대하는 민주당 내 비주류의 강한 성토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은 거함 이탈리아를 격파하면서 월드컵 4강의 꿈을 국민들에게 심어줬다. 이탈리아전에서 스페인전 사이 4일간 전국의 붉은 물결은 노 후보와 한화갑 대표가 재신임을 받는데 어려움을 덜어줬다. 태극전사들의 ‘신화 만들기’덕에 노 후보는 일단 최종평가의 칼날을 8·8재보선 이후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한나라당은 월드컵 특수 앞에서 그다지 달가운 표정만은 아니다. 한나라당이 월드컵 신화창조에 성원을 보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국이 축구열풍에 덮인 상황에서 한나라당은 지방선거 대승의 메리트를 크게 살리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역사상 유례 없는 야당의 대승이건만 월드컵으로 인해 우리의 결실이 다 묻혀버렸다”고 토로할 정도다.
월드컵 열풍은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됐었다. 9월8일에는 ‘남북 축구대표팀 서울 경기(가칭)’가 열릴 예정이었다. 아직 구체적인 협의 절차가 남아 있었지만 성사가 된다면 향후 남북교류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됐다.
정부 일각에서는 이 같은 축구 열기를 남북교류로 확대하기 위해 준비를 해왔다. 오래 전부터 제기돼왔던 경평축구 부활 문제, 민간 차원의 ‘북한 축구공 보내기 운동’ 등이 핵심 내용이었다. 북한 TV가 이례적으로 월드컵 한-미전과 외국경기를 방송함으로써 이런 무드가 조성되는 듯 했다.
그러나 29일 발생한 서해에서의 남북 교전은 이런 기류에 찬물을 끼얹었다. 우연이 일어난 사건이든, 고도로 기획된 사건이든 많은 사상자를 냄으로써 당분간 남북한의 냉각관계는 불가피하게 됐다. 서해교전은 어쩌면 월드컵으로 형성된 정치지형 전체를 날려보낼지도 모른다. 그만큼 충격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