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0월 오찬을 함께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참여정부 출범을 전후로 노 대통령과 DJ는 적잖은 애증관계를 쌓아 왔다. DJ의 보이지 않은 후광을 등에 업고 권좌에 오른 노 대통령은 참여정부 출범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면서 DJ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여기에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을 계기로 두 사람의 앙금의 골은 점점 깊어 갔다. DJ 스스로 “정치는 생물”이라고 말했듯이 시간이 흐르고 북한 핵 사태와 범여권 정치권 새판짜기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두 사람은 몇 차례 관계 복원을 시도했다. 지난해 11월 노 대통령이 DJ의 동교동 자택을 직접 방문해 회동을 가졌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우여곡절 끝에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하긴 했지만 완전한 범여권 통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두 사람의 대권 복심 또한 미묘한 차이점이 보이고 있다. 전·현직 최고 권력자이자 범여권 최대 주주인 두 사람이 똘똘 뭉쳐 범여권 통합을 일궈내고 후보단일화로 ‘반 한나라당’ 전선을 구축해도 연말 대선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대통령과 DJ가 여전히 정치적 앙금을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지만 범여권 대선주자가 정해지고 대선정국이 본격화되면 결국 두 사람은 ‘반 한나라당’이라는 명분으로 손을 잡게 될 것이란 관측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명분과 자존심보다 정치적 실리를 챙기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벌써부터 ‘노무현-DJ 정상회담 빅딜설’이 나돌고 있다.
빅딜설의 정점에는 대북송금 특검이 자리 잡고 있다.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한 기폭제가 됐던 대북특검과 관련한 모종의 딜이 진행되는 분위기도 감지되고 있다. DJ는 자신의 최대 치적이었던 햇볕정책이 대북특검으로 얼룩졌고 아직까지 명예회복을 못하고 있는 데 대한 강한 불만을 품고 있다.
실제로 DJ는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대북 특검 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DJ는 지난달 23일 정세균 전 의장 등 열린우리당 전직 지도부와의 면담 때와 30일 당시 신기남 통합신당 예비후보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대북송금 특검은 매우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사과를 요구하는가 하면 민주당 분당과 안기부 X파일 문제 등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세운 바 있다.
그러면서도 DJ는 정상회담과 남북문제 해법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 6일 자택을 방문한 김민석 민주당 후보에게 “북핵 문제가 풀리면 차기 정부 내에 (남북) 국가연합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며 나름의 구상은 내놓기도 했다.
이처럼 DJ가 노 대통령과 친노그룹을 겨냥해 채찍과 당근 발언을 절충해서 구사하고 있는 배경에는 자신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결자해지(結者解之) 차원에서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 내포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DJ의 이러한 요구에 청와대가 반발하기는커녕 오히려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석연치 않다. 정구철 청와대 국내언론비서관은 지난달 29일 청와대브리핑에 ‘훈수정치의 이데올로기’란 글을 통해 DJ의 ‘훈수정치’를 둘러싼 정치권과 일부 언론의 비판적 입장을 반박하면서 “국가원로의 전문적 식견과 통찰력은 ‘소중한 자산’”이라며 DJ를 적극 옹호했다.
청와대의 이 같은 입장은 10월 정상회담을 앞두고 노 대통령이 경험자인 DJ의 조언을 듣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상황도 고려됐겠지만 노 대통령이 모종의 결단을 준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적지 않다. 범여권 일각에선 신정아·정윤재 사건 등이 잇따라 터지면서 레임덕에 직면한 노 대통령이 마지막 남은 승부수인 정상회담 카드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DJ의 명예회복을 추진하고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DJ가 요구하고 있는 ‘사과’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유감’ 표명 정도로 DJ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대신 DJ의 폭넓은 대북 채널과 풍부한 식견을 정상회담 과정에서 활용할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대북송금 특검 문제는 비단 DJ의 명예회복을 떠나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 과정에서 평화협정 등 깜짝 이벤트를 연출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관계가 경색국면을 면치 못했던 이유 중에 대북 특검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정균환 통합신당 최고위원은 5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을 특검했던 노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며 “북에 가서는 어쩔 수 없이 사과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정 위원은 또 “정상회담 특검으로 남북관계가 대단히 악화됐고 그로 인해 국가적으로 손해를 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대북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상회담 전에 김정일 위원장에 대한 유화책을 명분으로 대북 특검에 대한 유감을 표명해 정상회담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DJ와의 화해 메시지로 대권연대를 본격화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되고 있다. 두 사람의 정상회담 빅딜설이 현실화될 가능성에도 힘이 실리고 있는 분위기다.
DJ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이틀 전인 15일 이재정 통일부 장관이 동교동으로 DJ를 예방한 배경을 둘러싼 뒷말도 무성하다. 통일부는 이 장관이 DJ에게 정상회담 준비 상황 등을 설명하고 자문을 받기 위해 방문한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하지만 DJ의 방미 활동 역할론과 맞물려 정상회담 주무장관이 DJ를 예방한 배경이 왠지 석연치 않다는 시각이 많다.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대북특검 유감 표명 등을 담보로 DJ에게 사실상의 특사 역할을 주문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2차 정상회담을 목전에 두고 1차 정상회담 주인공인 DJ의 방미 활동은 무르익고 있는 한반도 평화협정 문제 등과 맞물려 상당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2005년 4월 미국 아시아재단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 이래 약 2년 5개월 만에 방미한 DJ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각계 인사들을 두루 만나 6자회담과 2차 남북정상회담, 한반도 문제, 동북아정세, 한미 관계 협력증진 등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할 예정이다.
지난 7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반도 비핵화를 전제로 평화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을 했지만 한반도 정전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넘어야 할 난제도 많다. 무엇보다 남북과 미국이 한반도 평화제체를 확립하기 위한 선행조건을 달고 있는 게 문제다. 우리 측은 평화협정 체결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는 반면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북한은 북미 수교를 전제조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정상회담 전에 미국과 남북 간에 물밑 합의점을 찾지 못할 경우 이번 정상회담에서 깜짝 이벤트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란 회의론이 나돌고 있는 배경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DJ의 방미 활동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나 정부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DJ의 특사 역할론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실제로 노 대통령이 DJ에게 특사를 맡겼는지는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에 공감하면서 정상회담 특수를 대선정국에 활용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복심에 비춰볼 때 역할에 따른 물밑 교감은 나눴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DJ가 방미 활동을 통해 정상회담 의제와 관련한 해법을 가지고 돌아올 경우 노 대통령도 대북 특검 유감 표명 등을 통해 DJ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동시에 정상회담 분위기를 끌어올릴 또다른 승부수를 띄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각에선 DJ가 귀국(29일)한 후 두 사람이 만나 그동안의 앙금을 말끔히 해소하는 동시에 정상회담이라는 ‘빅쇼’를 공동으로 연출하는 등 연대를 가시화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연말 대선에서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공동 운명체인 만큼 이번 정상회담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관계를 복원하면서 대권 연대로 이어갈 가능성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도 노 대통령과 DJ가 각자 의중에 두고 있는 범여권 후보를 막후에서 지원할 수 있겠지만 최종 후보가 결정되면 어떤 식으로든 힘을 합칠 것으로 보고 있다.
범여권 관계자들은 정상회담 빅딜 여부를 떠나 두 사람이 힘을 합칠 경우 더 많은 정상회담 과실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고 본격화되고 있는 대선정국에서도 한반도 평화무드라는 핵심 이슈를 선점해 대선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총체적 위기상황에 직면한 노 대통령과 불명예를 씻기 위해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DJ가 최후 승부수인 정상회담 특수를 계기로 반전을 모색하는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두 사람의 향후 행보에 정가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