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에서 열린 농심배 한중일 바둑대회를 마치고 인천공항에 돌아온 이창호와 그의 팬들. | ||
잠시 당황하던 청년의 얼굴은 곧 복받쳐 오르는 감격으로 물들었다.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피켓. 1986년 11세의 어린 나이에 프로의 무대로 뛰어든 이후 20년, 세계대회 우승컵을 안고 돌아온 것이 어디 한두 번일까마는 일찍이 이런 환영은 없었다. 언뜻 비친 안경 너머 두 눈의 습기는 눈물일까.
“누가 슬럼프래? 꿇어!”
“미안하다 다 이겼다.”
“누가 슬럼프래? 모두 꿇어!”
“농심배 30연승 전설은 끝나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공항 출구 전면 허리 높이로 둘러쳐진 펜스 뒤로 수십 명의 팬들이 청년을 향해 일제히 환호했다. 대기하고 있던 한국기원 직원과 팬들로부터 꽃다발이 안겨지고 다시 박수갈채와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지나가던 소녀가 ‘뭐지? 누구야?’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을 가늘게 좁히며 다가왔다.
저 남자는 누군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하고 있는 걸까. 옷차림이 화려하지도 않고 조각처럼 미끈한 외모도 아닌 걸 보면 연예인은 아닌데. ‘아!’ 소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서너 걸음 앞으로 다가와서야 비로소 청년의 얼굴을 알아본 것 같다. 소녀는 허둥지둥 숄더백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인파에 둘러싸여 사인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평범한 외모의 청년. 그는 누구일까.
환호하던 팬들의 맨 앞쪽에 선 남자가 피켓을 다시 들어올렸다. 거기 뚜렷하게 적힌 글씨가 보였다. ‘바둑의 신 이창호 응원천사 두터미’. 한·중·일 3국이 겨루는 국가대항 단체전 제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 홀로 남아 중국, 일본의 정상급 프로 5인을 연파하고 6년 연속 우승을 이끌어낸 이창호, 바로 그였다. 이창호, 이창호! 팬들의 열띤 연호는 그가 기념촬영과 사인을 마친 뒤 한국기원이 대기시켜 놓은 승용차에 몸을 싣고 떠날 때까지 공항 청사에 크게 울려 퍼졌다.
''세계가 인정한 1인자''
프로바둑의 세계 최강자 이창호. 그는 살아있는 신화다. 프로입문 20년간 그가 작성한 기록들은 일찍이 ‘천재 중의 천재’로 불렸던 스승 조훈현의 그것들을 훌쩍 뛰어넘어 전인미답의 세계로 들어선 지 오래다.
프로 입문 2년 만에 첫 타이틀을 획득한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공식 타이틀 획득 1백21회(세계대회 우승 19회, 국내대회 우승 1백2회). 입단 4년차에 기록한 41연승, 세계최연소 타이틀획득(국내대회-88년 13세 제8기 KBS바둑왕전, 세계대회-92년 15세 제3회 동양증권배), 국내 타이틀전 19연속 우승(94년 제4기 BC카드배~96년 제13기 대왕전), 세계대회 12회 연속우승(92년 제3회 동양증권배~99년 제3회 LG배세계기왕전)의 기록은 그 누구도 넘보지 못할 불멸의 금자탑이다.
사실, 이창호의 개인통산 타이틀획득 기록에서는 제외되지만 이창호가 보유한 그 어떤 기록보다 완벽한 기록은 따로 있다. 올해로 6회째를 마감한 농심 신라면배 세계최강전에서의 개인기록이다. 이창호는 1회부터 3회 대회까지 21연승(예선 16연승, 본선 5연승)을 기록했고 4회부터는 와일드카드를 받아 본선으로 직행해 9연승을 기록, 통산 30승 무패(예선 16연승, 본선 14연승)의 신기록을 작성했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이란 이럴 때 써야 하는 표현이 아닐까.
세계대회 우승 한 번 없는 중국의 녜웨이핑이 1~4회 중일슈퍼대항전(85년~88년) 통산 11연승 하나로 국가로부터 영웅 칭호를 받고 지금까지 엄청난 후광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96년에 이창호가 받은 은관문화훈장은 대한민국 정부가 보여준 최소한의 성의 표시였는지도 모르겠다.
▲ 농심배 대국 모습. | ||
이창호의 등장 전후로 세계정상에 올라선 기사는 많지만 이창호와 같이 세계가 흔쾌히 인정한 1인자는 없다. 일본기원이 발행하는 바둑전문 주간지 ‘슈칸고(週刊碁)’는 ‘세계가 이창호를 좇는 시대’라는 타이틀로 대서특필한 바 있고 중국의 유수한 신문, 방송 역시 이창호 앞에 ‘천하제일’이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데 추호의 거부감도 보이지 않는다. 세계가 뒤를 좇는 천하제일인. 그가 바로 이창호다.
보통 사람들의 ''자존심''
바둑 종주국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바둑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등 국가적 차원에서 총력을 쏟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창호 신드롬’을 넘어 ‘이창호 신성화’의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다. 지난해 CSK배 단체전 우승으로, 2000년 LG배세계기왕전 우승 이후 4년 만에 세계대회 우승을 맛본 중국기원의 천쭈더 주석은 대표팀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CSK배 우승은 대단히 기쁜 일이다. 이 승리는 중국바둑의 자신감을 드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우리는 이 시합을 통해서 우리의 실력이 한국과 별 차이가 없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창호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뿐인가. 불과 며칠 전 제4회 잉씨배 우승으로 중국바둑이 16년간 품어온 비원과 세계대회 준우승 6회에 머물렀던 자신의 한을 후련하게 풀어버린 창하오 역시 우승 인터뷰 중 ‘현재 세계 정상급 기사들의 수준은 어떤가’라는 질문에 대해 ‘한중일 3국의 정상급 기사들은 모두 비슷하다. 그러나 이창호 9단은 홀로 높다. 그는 어떤 기사들보다 강하다’고 답하며 이창호에 대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제6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최강전에서 단기필마로 상하이에 뛰어든 이창호가 중국, 일본의 정상급 강자 장쉬, 왕레이, 왕밍완, 왕시를 차례로 격파하고 우승을 결정짓던 순간 중국 인터넷 바둑사이트에 접속한 수많은 네티즌들이 중국의 우승보다 이창호의 승리를 기원했다는 사실은 이창호가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가장 사랑 받는 이 시대 최고의 승부사임을 입증한 것이다.
한국의 바둑 팬들은 그렇다 쳐도 중국, 일본의 바둑 팬들은 왜 그토록 이창호에게 열광하는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섬광과 같은 재능을 번득이거나 치열한 승부혼을 가진 1인자는 많았다. 아니, 그것이 천재 승부사의 전형이었다. 도사쿠(道策)가 그랬고 우칭위엔(吳淸源)이 그랬으며 조훈현, 조치훈이 그랬다. 그러나 이창호는 달랐다. 이창호는 과거의 그 어떤 1인자와도 같지 않았다.
스피드를 추구하는 현대바둑에서 답답하리만큼 두텁고 느린 기풍으로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이 그렇고, 한눈에 천재임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부신 재능, 남다른 기행과 일상을 보였던 과거의 1인자와는 달리 어눌하리만큼 조용한 언행과 성실하게 노력하는 평범한 일상이 또한 그렇다. 언행과 일상에서 이창호는 보통사람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으며 그것은 이창호 이전의 그 어떤 1인자도 갖지 못한 강력한 중독의 기능으로 작용했다.
바둑에 관한한 이창호는 모든 보통 사람들의 희망과 자존심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바둑 안팎에서 감동과 사랑을 느끼는 것은 그가 ‘평범한 것이 가장 강하고 아름답다’는 진리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무너지는 날 어쩌면 그들은 심각한 공황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매사에 비범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반작용이 낳은 ‘평범의 카리스마’. 이창호 그는, 평범하기에 더욱 위대하다.
손종수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