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연말 노무현 당선자와 만난 박 실장. | ||
DJ정부 임기 만료를 불과 20여 일 남겨둔 상황에서 신•구 권력 간에 최대 ‘뇌관’인 ‘대북 비밀지원설’의 실체가 벗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노 당선자측이 이번 사안을 계기로 이른바 ‘국민적 의혹’사건에 대한 본격적인 규명에 들어가는 등 ‘과거 청산’작업에 본격 착수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노 당선자측은 우선 대북 송금 파문이 정치적으로 해결되기를 희망하는 입장.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문희상 청와대 비서실장 내정자의 2일 발언이 이 같은 기류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DJ가 대북 송금을 사실상 시인해 진실의 대강이 밝혀진 만큼 ‘이제 검찰 차원을 넘어’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 내정자 등의 이 같은 언급은 노 당선자가 지난달 17일과 18일,그리고 22일 세 차례에 걸쳐 대북 비밀지원설 등 ‘국민적 의혹’에 대해 “검찰이 정치적 고려 없이 수사해서 진실을 규명할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실제 설 연휴 초만 해도 노 당선자 진영에서는 “우리쪽이 피투성이가 돼도 의혹은 반드시 밝힐 것”(임채정 인수위원장)이라며 ‘정면돌파론’이 대세를 형성했었다.
그러면 ‘돌변’이라 할 만큼 노 당선자측의 입장이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 인수위 주변에서는 무엇보다 DJ가 대북 송금건에 대해 “사법심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힌 것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하고 있다.
노 당선자의 한 측근은 “노 당선자는 대북 송금 의혹에 대해 사실을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는 입장엔 변함이 없다. 하지만 DJ가 직접 검찰수사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밝힌 만큼 이를 존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권 이양기에 DJ와의 정면충돌이 불가피해지고 이는 노 당선자로서도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라고 설명했다.
노 당선자측은 그러나 ‘정치적 해결론’이 대(對) 국민 설득력이 약한 데다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 조차 “수긍이 가지 않으며 적절하지 않다”(조순형 의원)며 반발하고 있는 데 대해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특히 고건 총리 지명자에 대한 인사청문회와 뒤이은 인준 표결 등 야당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들이 적지 않은 시점에 대야 관계를 경색시켜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민주당 한 중진은 “노 당선자가 DJ정부의 과오에 대해 ‘털 것은 털고 가야 한다’는 초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대북 송금 건에 이어 국정원 도•감청 의혹 등 대기중인 대형 의혹 사건들에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없으며 그러면 개혁 드라이브도 힘들어지게 된다”고 밝혔다.
노 당선자측이 이처럼 ‘정면돌파론’과 ‘정치적 해결론’ 사이에서 고민하면서 새로 부상한 대안이 이른바 ‘결자해지(結者解之)론’이다. 결자해지론은 대북 송금의 실체와 관련해 청와대와 정부가 야당과 국민에게 일단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밝혀 협조를 구할 것은 구하고 검찰수사나 국정조사 또는 특검제 실시 등은 그 후에 고민하자는 얘기로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 내정자 등이 제기하고 있는 방안.
유 내정자는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나 “지금까지 청와대에서 나온 말만 갖고 어느 국민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겠으며 야당이 반발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래서는 ‘국민정서법’을 통과할 수 없다”며 “국익을 고려하되 정부나 청와대측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관련 상임위 등에서 구체적인 진실을 밝히고 사과할 일이 있으면 사과하는 등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 ‘결자해지론’에서 거론되고 있는 또 다른 인사들. 왼쪽은 방북했다 돌아오는 임동원 외교안보통일특보. 오른쪽은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 | ||
DJ정부 대북 정책과 관련해 국민과 야당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책임있는 인사’로는 최근 대북 특사로 평양을 다녀온 임동원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당시 국정원장)와 2000년 4월 남북정상회담 밀사로 맹활약한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그리고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았던 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한광옥 최고위원의 경우 본인의 거듭된 부인에도 산업은행에 대출압력을 넣은 배후인물로 지목(지난해 국정감사 때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 발언)된 바 있고, 당시 밀사 역할을 했던 박지원 비서실장도 ‘무관하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으로부터 ‘대북 송금 실무총책’으로 지목된 상태다.
또한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의 경우도 ‘현대상선이 대출받은 2천2백억여원을 26장의 수표로 바꾸는 과정에 국정원 직원이 간여한 것으로 보이며 이런 의혹으로부터 임 당시 원장도 자유롭지 않다’는 한나라당측의 공세를 받고 있다. 유인태 정무수석 내정자도 “임동원 특보나 박지원 실장 등 관련 당사자들이 국회에 가서 진상을 먼저 밝힌 뒤 한나라당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최근 청와대와 노 당선자측이 현대상선 대북 비밀지원설의 실체 및 향후 대응책에 모종의 밀약을 맺었을 것이란 분석이 여야로부터 동시에 제기돼 눈길을 끌고 있다. 한나라당 한 핵심 관계자는 “최근 2억달러 대북 송금을 둘러싼 진실이 현 정부 정보기관 최고위 관계자의 발언으로부터 비롯됐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며 “이는 현 정부와 차기 정부 간에 대북 송금문제에 대한 물밑 합의가 이미 이뤄졌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치권에서 현대상선 대북 지원 의혹이 다시 불거진 계기가 됐던 문희상 비서실장 내정자의 지난달 15일 “현 정권이 제기된 의혹을 털고 가야 한다”는 발언의 배경에 문 내정자와 청와대 핵심 관계자 간의 사전 정보제공과 논의가 있었음이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됐다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또 “노 당선자측에서는 청와대에 대북 송금을 주도한 여권 인사 중 사법처리 대상도 나올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한 것으로 안다. 청와대는 이에 대북 송금이 ‘비리’가 아닌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통치행위’임을 강조하며 가급적 정치적 책임을 인정하는 선에서 매듭짓되 여론의 추이를 봐서 사법적 책임을 지는 문제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들었다.
청와대에서는 여권 고위 관계자가 대북 송금의 실체를 밝힐 경우 파장은 크겠지만 특정 개인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지는 않을 것이란 판단에다 사법처리를 할 마땅한 법규도 없다는 점을 감안, 이 같은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청와대 사정에 밝은 민주당 한 중진도 밀약설을 뒷받침하는 발언을 내놨다. 이 중진은 “청와대측도 어떤 식이든 대북 송금 파문을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데는 노 당선자측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으며 책임질 것은 책임지겠다는 입장이다.
다만 향후 이를 둘러싸고 논란이 증폭되더라도 새 정부가 대북송금건을 ‘검은 거래’나 ‘정상회담 대가’로 몰아가려는 야당의 주장에는 공동대처해야 한다는 메시지도 아울러 보낸 것으로 안다”고 말해 양측 간에 상당한 수준의 막후 논의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청와대와 노 당선자측이 이처럼 물밑에서 공동대응을 모색하고는 있지만 대북 송금을 둘러싼 파문이 가라앉을 때까지 공조가 지속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전망이 많은 편이다. 앞서 언급한 민주당 중진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론의 동향인데 국민들 사이에 ‘북한에 돈을 줬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데 대한 충격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남북정상회담과 대북 송금과의 함수관계,송금된 돈의 용도 등에 대한 의혹이 연이어 불거질 경우 권력의 생리로 볼 때 양측 간의 물밑 신사협정이 제대로 지켜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해 여론 향배에 따라 양자 간에 ‘일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또 “노 당선자측이 ‘정치적 해결’을 내세워 국회에 대북 송금 해결책을 일임한 것은 DJ의 입장을 고려해 신 여권이 앞장서서 청와대를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청와대를 보호하려 들지는 않겠다는 뜻”이라며 “대북 송금 건에 대해 청와대가 직접 야당과 여론을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자구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노 당선자측의 확고한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겉보기에는 김 대통령과 노 당선자가 아직 한시적인 동거를 하는 듯하지만 이미 내부적으로는 결별의 수순을 밟고 있다는 시각이다. 박영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