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29일 국회에서 열린 정당개혁방안 토론회에 참석 한 여야 의원과 시민단체 대표들. 임준선 기자 | ||
노무현 당선자가 한 말이다. 총선거가 1년 남짓 남아 야당에서 몇 사람 데려와 봐야 별 의미가 없다. 그래서 정계개편은 없는 게 아니라 안하는 것으로 봤다. 그런데 당선자 주변 사람들은 “정계개편은 있다”고 말한다.
민주당의 당선자 그룹인 ‘열린 개혁파’와 당선자와 호흡을 같이하는 ‘개혁당’ 진영은 정계개편에 대해 한 목소리다. 한나라당에서도 개혁파를 자처하는 ‘국민속으로’ 멤버들이 “정계개편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럼 당선자의 말과 그 주변 사람들간의 정치구상이 다르다는 것인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리도 없다. 인위적 정계개편은 없지만 정계개편은 있다. 여기서 설명이 필요하다.
인위적 정계개편이란 여당에서 야당의원을 빼가는 개편이라고 그들은 해석한다. 노 당선자가 말한 것은 한나라당에서 의원을 빼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반면 당선자 주변에서 말하는 정계개편은 국민 속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 정계개편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국민 속에서 일어나는 개혁은 그들 말로는 ‘인적 청산’이다. 인적 청산운동에 따라 물러나는 사람, 새로 진입하는 사람들로 정계가 자연스레 재편성된다는 얘기다. 그게 가능할까.
선거가 다가오면 정당마다 신진 기용, 선거를 겨냥한 신당운동 같은 건 있어도 정계개편은 없다. 그런데 선거하기 전에 정계개편은 있다는 것, 아니 기필코 한다는 얘기다. 설 연휴 때 어느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권의 정치구상에 정통한 한 인사가 친척인 한 국회의원에게 귀띔했다.
“3월이 되면 정치가 시끄러워질 겁니다. 여러 곳에서 특정 정치인을 지적해 물러나라는 운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게 인적 청산의 시작입니다. … 인터넷을 통해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시민단체만이 아니라 상상하지 못했던 사람들과 단체들도 인적 청산운동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는 3월에 올 사태를 ‘한국판 문화혁명’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규모는 문혁에 비할 바 아니지만 한국판 문혁은 정치권이 이전에 겪은 일이 없는 새로운 방식의 바람이 될 것이라는 얘기였다.
문화혁명이 될지 이전투구가 될지 어느 쪽일지는 모르지만 정계의 바람을 예고하는 움직임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민주당은 정치개혁을 인적청산으로 정리해놓고 있다. 노 당선자와 지향점이 비슷한 개혁당이나 일부 시민단체들이 인적청산에선 강력한 연대고 어느 면에선 전위대들이다. 한나라당 안에서도 개혁파는 인적청산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 인적 청산의 표적은 누구일까.
최근 정치개혁을 주제로 한 인천의 한 모임에서 발제에 나선 한 인사는 “인터넷과 이동전화를 무기로 하는 새로운 주체들은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서 “온몸으로 확보한 진지에서 생생한 일상정치를 실현할 대안조직을 고안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의 발언 중 주목할 만한 대목은 민주당의 살생부에 대한 언급이다.
1월 중순 민주당을 흔들어댔던 살생부는 한 네티즌이 인티넷 게시판에 써 올린 글로 정치적으론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묻혀버렸다. 노사모 회원이라고는 하나 철공소 직공이고 당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게 민주당의 공식적인 발표다. 민주당 자체에서 조사한 후 내린 결론이니 맞는 얘기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문은 남아 있다.
▲ <일요신문>의 ‘살생부’ 관련 보도. | ||
이걸 민주당은 공식적으로 무시한다고 했지만 이 모임의 발제자는 이 살생부를 “네티즌들은 공유하고 있던 내용”이라고 했다. “네티즌들이 공유하고 있던 내용인 살생부를 두고 보수언론이나 야당, 민주당 일부 인사들이 ‘함량미달 정치인 청산’이라는 국민적 공분을 모른 채 소란을 벌인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의 말대로면 살생부 속에 인적청산의 소리가 담겨있다는 얘기다.
표면적으로 살생부는 일단 무시하는 것으로 했지만 민주당의 인적 청산은 그 대상이 광범할 것 같다. 노무현 당선자는 1월23일 당 연찬회에서 “지구당 위원장의 기득권 포기가 당 개혁의 핵심”이라고 했다. 민주당 개혁특위 김원기 위원장은 1월29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상향식 공천과 열린 정당을 위해 지구당 위원장의 기득권 배제가 개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서 “국민이 보기에 믿을 수 있는 정치인을 배치하는 인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잇따라 이상수 사무총장도 “지금 제도개혁보다 중요한 것은 당의 면모를 쇄신하는 인적개혁”이라며 “총선을 앞두고 현재 지구당 위원장들을 여러 가지로 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목할 것은 지구당 위원장들을 여러 가지로 검증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어쩌면 정부 요직 이른바 빅4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국회의원 전원에게 적용하는 운동이 아닐지 모르겠다.
민주당을 겨냥한 인적 청산 압력은 당 밖에서 더 강하다. 개혁당 대표 김원웅 의원은 “지금 국회엔 정치인이 없다. 보수를 위장한 부패세력, 지역주의에 편승한 분열세력이 남아 있다. 국회를 정치적으로 폭파할 알 카에다가 필요한 때”라고 주장했다.
개혁당의 홍영표 사무총장은 “내년 총선에서 70% 이상의 의원을 물갈이 못하면 남은 4년 기간 노 정권은 힘들 것이다.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새로운 정치세력을 모아 나가는 것이 내년 총선의 의미”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안에서 인적 청산을 합창하는 ‘국민속으로’라는 이름의 의원서클은 이부영 등 이른바 한나라당 내 진보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 멤버, 1백50명 의원 중 10명이 채 안되는 소수파지만 목소리는 가장 높고 전투적이다.
이들은 당내 보수파는 모두 물러가라고 외친다. “부패 및 공작정치에 연루된 구 민정계 사람들은 다음 총선에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말로 일단 당내 민정계를 주 표적으로 겨냥하고 그중 5명의 중진을 ‘물러가야 할 1호’로 손꼽았다. 주목할 만한 것은 ‘공작정치의 본산’ ‘민정계 기회주의자’ ‘수구보수의 원조’ ‘부패연루의 대표적 인물’ ‘대선 패배의 책임이 가장 큰 이회창의 핵심측근’ 등 5명에 대한 강도 높은 개별 비판이다.
민주당과 개혁당, 일부 시민단체, 그리고 한나라당의 ‘국민속으로’ 사람들은 인적 청산에 ‘합동’해 있는지 모른다. 이들은 박원순(정치개혁연대 상임대표) 최열(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등 일부 시민단체 지도자들과 합동, 정치개혁범국민추진협의회도 발족시켰다.
“15년 전 독재에 맞서 함께 싸운 세력이 다시 함께 하는 것이다.”(최열) “국가보안법 폐지하면 빨갱이 세상 되고 주5일 근무하면 노동자천하가 된다고 생각하는 그들끼리 당 만들고 우리는 우리대로 모여야….”(안영근)라는 말에서 보듯 정치권의 물갈이가 겨냥하는 건 종전의 정계개편과는 질이 다른 정계의 주류교체에 있다.
물갈이는 정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재야운동권의 핵심들을 정부 인사 담당 중심에 기용하는 노 당선자의 인선은 관계에 불어닥칠 인적청산을 예고한다. 민주당을 확 바꾸겠다고 했던 노 당선자의 말은 민주당이 아니라 이 사회의 주류 바꾸기 예고였던 것은 아닐까. “한국판 문혁은 정계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재계, 관계 등 각계각층으로 확산될 것입니다.” 소식통의 이 말은 DJ 5년에 이어 다가오는 5년도 주류교체라는 인적 청산이 계속된다는 얘기다. 홍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