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상선이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산업은행에서 4천9백억원, 당시 환율로 4억달러를 긴급 대출 받아 현대아산을 통해 북한에 넘겨줬다. 이 돈은 당시 금강산 관광대금으로 지불한다고 발표된 4억달러와는 다른 것으로, 6?5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지불한 것이다.”
엄 의원의 이날 ‘폭탄’ 발언은 당시만 해도 ‘황당한’ 주장에 불과했다. 하지만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이 다시 이 문제에 대해 ‘메스’를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노무현 당선자측은 검찰의 소신 있는 수사를 주문했다가 다시 국회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하자며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치행위” 한 마디에 “철저한 수사”에서 한발 물러선 상태다. 감사원도 ‘빙산의 일각’만 보여준 채 서둘러 문을 닫아버렸다.
▲ 지난해 국정감사장에서 ‘대북송금의혹’을 처음 터뜨렸던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 | ||
(1) 진짜 대출 신청자는 누구?
먼저 현대상선이 4천억원을 빌린 대출과정을 따라가보자. 현대상선은 지난해 6월7일 산업은행으로부터 긴급 운영자금 4천억원을 대출받았다. 현대측은 당시 “유동성 위기를 겪던 터에 계열사 유동자금으로 이 돈을 사용하기 위해 산업은행에 대출을 신청해 정당하게 대출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연 4천억원이 ‘정당하게’ 대출되었을까. 이번 사건의 첫 번째 의문점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감사원은 이 4천억원에 대해 “김충식 현대상선 전 사장이 박상배 산업은행 부총재(당시 영업1본부장)를 찾아가 대출을 요청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박 부총재의 일방적인 진술일 뿐 김 전 사장은 자신의 대출요청을 부인하고 있는 상태다.
당시 산업은행 영업1본부장이었던 박상배 현 부총재는 자신의 전결로 이 대출건을 승인했다. 박 부총재는 당시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이 찾아와서 빌려달라고 했고 이근영 산은 총재(현 금융감독위원장)와 협의한 결과 빌려주는 게 좋겠다고 해서 대출하게 됐다. 또한 대우그룹이 한창 어려웠는데 현대상선마저 망하면 한국경제는 끝난다고 생각해 지원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현대의 4천억원 대북지원설에 결정적으로 기름을 부은 것은 지난해 9월 국정감사에서 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의 발언이었다. 그는 “김충식 현대상선 사장이 ‘대출금을 만져본 적도 없다. 정부가 썼으니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진술을 했다. 또한 국정원, 청와대와 관련해서도 “김보현 국정원 3차장과 이기호 청와대 수석에게 이를 알렸더니 ‘알았다. 걱정마라’고 얘기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엄 전 총재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정부가 4천억원 대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고 이 내용을 청와대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현재로선 이 가능성이 더욱 굳어지고 있다.
(2) 2천2백35억 인출자는 유령?
감사원 감사 결과 현대상선이 대출받은 4천억원은 지난 2000년 6월7일 자기앞수표 7장으로 나뉘어 산업은행 영업부(9백94억원), 구로 지점(1천억원), 여의도 지점(2천억원) 등 3곳에서 인출되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후 4천억원 중에서 1천7백65억원은 외환은행 계동 지점 등 10여 개 은행에 개설된 현대상선 당좌예금 계좌에 입금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자금은 현대건설 등 현대계열사의 유동자금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한나라당에서는 이 자금의 사용처와 관련해 ‘정치자금’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인출과정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돈은 나머지 2천2백35억원에 관한 것이다. 먼저 2천2백35억원을 산업은행 구로 지점 등에서 자기앞수표 26매로 인출한 사람이 대출 당사자인 현대상선 직원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수표들은 ‘개인 6명’이 배서해 인출한 것으로 확인됐다. 더욱이 한 사람이 같은 필체로 26장의 수표에 6명의 각기 다른 이름으로 모두 배서했다는 점이 더욱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한나라당에서는 이를 두고 국정원이 개입한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지난 2000년 6월7일 산업은행이 현대상선에 4천억원을 대출해준 직후 국가정보원이 김경림 당시 외환은행장(현 외환은행 이사회장)을 모처로 불러 대북 송금자금의 환전과 송금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다’고 보도했지만 외환은행측이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는 상태다.
국정원은 돈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 ‘신원불명자 6명’을 동원해 돈세탁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문제의 신원불명자들은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국정원 요원들이 실명을 이용했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3) 누가 어떻게 북으로 보냈나
감사원 감사 결과 ‘누군가’ 인출한 2천2백35억원은 북한으로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돈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우선 살펴볼 문제는 전달 방식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 대략 세 가지 가설이 나오고 있다. 첫째는 북한의 유령회사 이용 가능성, 둘째는 현금(달러) 직접 제공설, 세 번째는 국정원 외교행낭 이용설 등이다.
한나라당은 이 가운데 유령회사 계좌를 통한 송금방식에 가장 무게를 두고 있다. 엄호성 의원은 “북한이 외화벌이 사업 명목으로 아ㆍ태 평화위원회 산하에 베이징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 5~6곳에 유령회사를 두고 있다는 게 정설”이라며 “이들 회사의 비밀 계좌를 통해 송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엄 의원은 지난 2월6일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이 이 돈을 언제 어떻게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좌추적뿐이다. 수표로 입금되었다 해외로 송금할 경우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며 “계좌추적만이 대북송금의 의혹을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부는 이에 대해 실명제 위반이라며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특검이 실시된다면 꼭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4) 경협 대가냐 패키지 딜이냐
이 사건 초기만 해도 대북 송금액 2천2백35억원이 정상회담 개최 ‘사례비’로 쓰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패키지 대가설’이 나오고 있다. 2천2백35억원의 용도가 꼭 정상회담만을 위해서 송금된 것이 아니라 현대의 대북사업 독점권 대가의 성격도 띠었다는 것이다.
이 가정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남북 당국자 간 예비접촉 때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회장 등 현대 수뇌부가 참석했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 즉 북한은 두 가지를 한 묶음으로 보고 현대의 대북 송금을 조건으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해 주었다는 것이다.
한편 현대상선 대출금 가운데 나머지 1천7백65억원에 대해서도 현대측 주장과 달리 새로운 의혹들이 속속 제기되고 있다. 현대상선은 나머지 1천7백65억원에 대해 ▲현대건설 기업어음(CP) 매입(1천억원)과 ▲현대상선 기업어음 상환(7백65억원)에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현대건설에 1천억원을 빌려주고 현대상선 자신이 남은 돈을 빚 갚는 데 썼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의 한 특위위원은 “4천억원 가운데 현대 계열사 간 내부자 거래로 최종처리된 1천7백65억원의 흐름을 추적해보면 엄청난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1천7백65억원이 현대계열사 간 기업어음(CP) 거래에 사용되기 전 수표와 현금으로 여러 차례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여권 고위 관계자들이 일부 돈을 챙긴 비리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현 정부 실세들의 정치자금일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밝혔으나 구체적 근거는 대지 못했다(관련기사 참조).
(5) 대체 얼마가 북으로 갔나
한나라당은 총 5억~15억달러가 북측에 전달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드러난 2천2백35억원(약 2억달러)은 빙산의 일각이라는 주장이다.
이성헌 의원은 지난해 9월25일 정무위 국감에서 "2000년 5월 말 현대건설이 이아무개씨를 통해 1억5천만달러를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6개 계좌로 나눠 북한에 송금하는 등 6?5남북정상회담 전 이익치 당시 현대증권 회장 주도로 각 계열사가 모금한 5억5천만달러를 북한에 지원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주영 의원도 지난해 10월28일 예결위에서 “2000년 7~10월 현대전자가 영국 스코틀랜드 반도체공장 매각대금 1억6천2백만달러 중 1억달러를 중동의 유령회사 ‘현대 알 카파지(HAKC)’를 거쳐 북한에 보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야당 의원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드러난 2천2백35억원 외에 3억달러 이상이 추가로 북한에 보내졌으며 ‘비공식적인’ 대북송금 총액은 5억달러를 넘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나라당 박진 의원은 지난 2월4일 의원총회에서 미 의회조사국(CRS) 래리 닉시 수석전문위원이 지난해 3월 미 의회에 제출한 ‘한반도 관계 보고서’를 인용, “현대의 대북 비밀지원액은 모두 8억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이 내용은 현대의 ‘반박 주장’이 받아들여져 4월 보고서에서는 삭제되었다).
한나라당 엄호성 의원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나온 의혹을 종합해보면 송금액 규모를 최소 5억달러에서 15억달러까지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하지만 설익은 것을 그대로 폭로할 수는 없어서 팩트를 확인중이다. 이번 사건은 저절로 모든 의혹이 밝혀질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