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박희태 신임 대표.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박 대표는 지난 3일 서울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대의원 투표와 여론조사 결과를 합산해 6129표를 얻어,5287표를 얻은 정몽준 의원을 842표 차이로 제쳤다. 이명박(MB)계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박 대표는 특히 대의원 투표에서 유효 득표의 29.5%를 얻어 정 의원(16.6%)과 3위를 차지한 박근혜계 대표주자 허태열 의원(18.9%)을 크게 이겼다.
박 대표를 축으로 한 새 지도부는 구성상 MB계의 헤게모니가 더욱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MB 친정 체제’란 평가도 나온다. 박 대표가 지난해 대선 후보 경선 당시 MB캠프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데다 최고위원단 진입에 성공한 공성진·박순자 의원 역시 MB계다.5명의 선출직 최고위원 중 MB계가 60%를 차지한 것이다.
여기에 당연직 최고위원인 홍준표 원내대표와 임태희 정책위 의장 역시 친 MB 성향이 뚜렷해 한나라당 지도부는 가히 ‘MB계 천하’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지도부에 유일한 박근혜계 인사인 허태열 최고위원은 공개적으로 “‘MB의 친정체제가 구축됐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니다.당뿐만 아니라 정부, 국회 모두 다 MB계다”고 토로할 정도다.
MB의 그늘이 짙어진 만큼 ‘박희태 체제’는 기본적으로 ‘관리형’의 색채를 강하게 띨 것이란 것이 당 안팎의 지배적인 분석이다. 박 대표 본인은 “나는 관리형 대표가 아니라 ‘화합형 대표’”,“고분고분한 여당이 아니라 꼿꼿한 여당을 만들겠다”며 포부를 밝혔지만 당 내외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다.
일단 당청 관계는 순항할 것으로 전망된다. 박 대표가 당권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 MB계의 전폭적인 지원, 다시 말해 MB의 의중이 반영된 것인 만큼 당청 간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소지는 그만큼 줄어들 것이란 얘기다.
당내에선 특히 박 대표가 ‘당청 일체론자’란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박 대표는 지난해 12월 17대 대선이 끝난 직후 한 방송 인터뷰를 통해 “과거에는 여당이, 즉 대통령이 있는 당이 당권과 대권을 구분해본 일이 없다. 우리가 과거 여당 때도 전통적으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해 왔다”며 현행 당헌에 규정된 ‘당권-대권 분리’ 규정을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박 대표는 3일 전대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설파했다. “지금의 당헌·당규는 우리가 10년 동안 야당을 하면서 청와대가 ‘존재’하지 않을 때 만든 것이다. 이제 여당이 돼서 국정에 대해 뒷짐 지고 비판만 할 수 없는 만큼 한번 더 검토해보고 이걸 가지고도 갈 수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는 얘기였다.
‘당권-대권 분리’ 당헌을 손보겠다는 박 대표의 당선 일성에 대해 박근혜계는 “입으로는 화합을 얘기하면서 행동은 정반대로 가겠다는 것이냐”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계 한 의원은 “현행 당헌은 홍준표 원내대표와 박형준 청와대 홍보기획관 등 MB계 인사들이 주도한 당 혁신위원회에서 2006년에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MB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박 대표가 개정을 요구하고 나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며 “당청 일체를 통해 그들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한마디로 당을 청와대가 컨트롤하는 ‘MB당’으로 만들고 비주류는 당 운영에서 철저히 배제하겠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박 대표가 ‘화합’을 당 운영의 모토로 내걸었지만 그가 당권을 쥘 수 있게끔 만든 MB계의 이해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란 분석이 많다. 박 대표는 대표에 선출된 직후 “내가 계파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나는 원래 계파가 없는 사람이고 전대에서도 여러 계파에서 나를 지지한 만큼 ‘초 계파’로 당을 운영하겠다. 인사권도 계파를 초월한, 계파 갈등을 없애는 식으로 행사하겠다”고 강조한 바 있다.
▲ 친박근혜계 후보를 응원하는 당원들. 허태열 후보는 3위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 ||
박근혜계의 반응은 더욱 차갑다. 당장 지도부의 일원인 허태열 최고위원까지 “이번에 당 지도부가 저 하나 빼고는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 체제로 가버리기 때문에 사실은 걱정이다. 소외가 불만을 가져오는 것이고 그 불만이 당내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인데 이렇게 철저히 주류 중심으로 모든 인사가 가버리니까 그렇지 못한 소수파는 허탈감이 지속될 수 있다”고 ‘경고 반 우려 반’의 심정을 밝힐 정도다.
영남권의 한 의원도 “사실상 청와대 의지가 상당 부분 반영되는 지도체제가 구성된 셈이고 박근혜계 입장에서는 더 안 좋은 상황이 된 것이다. 앞으로 당직 인선 등에서도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고 당분간은 계속 냉랭한 상황이 이어지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한편에서는 이번 전대에서 박 대표가 대의원 투표결과로 대변되는 ‘당심’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민심’의 지표인 여론조사에선 정몽준 최고위원에 크게 뒤진 만큼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여론조사에서 정 최고위원은 46.7%의 지지를 얻은 반면 박 대표는 30.1%를 얻는 데 그쳤다.
당내에선 이번 전대에서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은 정 최고위원이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당내 현안에서 제 목소리를 내려 할 것이란 전망이 많다.MB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박 대표와 접전을 벌인 만큼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행동반경을 넓혀 나가려 할 것이고 필요하다면 박근혜계와의 연대를 통해 박 대표와 MB계를 견제하려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당내 문제뿐 아니라 난마처럼 꼬인 시국 상황을 돌파하는 데 박 대표가 얼마나 역량을 발휘할지도 관전 포인트다. 당장 쇠고기 정국을 거치며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7월 초 현재 30% 안팎까지 떨어진 형편이다. 게다가 MB와 ‘한 묶음’으로 비춰지는 박 대표인 만큼 MB의 국정지지율이 지금처럼 20%대에서 반등하지 못한다면 그로서도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예상이다.
일부에서는 벌써부터 ‘박희태 체제’가 2010년 지방선거를 치르기 전에 중도하차할 수도 있다는 시나리오를 언급하기도 한다. 2년 임기를 채운다면 마땅히 다음 지방선거를 현 지도부가 치러야 하지만 내년 4월께부터 실시될 재·보궐 선거에서 성적표가 좋지 않으면 지도부 사퇴 요구가 계속 불거질 것이란 얘기다. 지금의 추세로는 2004년 4월 17대 총선에서 원내 과반을 넘는 152석을 얻는 전과를 올린 열린우리당이 이후 각종 재·보선에서 연전연패하면서 지도부가 수시로 교체된 전철을 밟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낮은 지지율을 회복하지 못하고 향후 재·보선에서 실패한다면 가뜩이나 계파갈등이 첨예한 한나라당 상황에서 당장 ‘책임론’이 불거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비주류인 박근혜계 입장에선 ‘MB계 천하’인 지금의 지도부가 ‘롱런’하는 것을 그다지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계기가 마련되면 지도부 내 유일한 박근혜계인 허태열 최고위원이 자신의 거취를 담보로 ‘지도부 총사퇴’를 선도할 수도 있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18대 총선 낙천의 아픔을 3개월 만에 딛고 집권 여당 대표로 화려하게 부활한 박 대표의 앞길은 이처럼 탄탄대로가 아니라 ‘험로’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대표가 과거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4년 3개월간 민정당, 민자당의 ‘명대변인’으로 활약할 당시 만든 조어 중에 ‘총체적 난국’과 ‘정치 9단’이란 표현이 있다. 1988년 13대 총선을 통해 정치에 입문한 후 20년간 여당 대변인과 원내총무, 야당 원내총무와 대표를 거치면서 어느덧 정치 9단 반열에 오른 박 대표가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두고 볼 일이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