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일본 <주간겐다이>가 공개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새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인 ‘옥희’의 모습. 김 위원장의 개인 자금까지 관리하는 비서 겸 애인이라고 한다. | ||
자리 따로 준비
지난 1월 김정일 중국 방문의 숨은 의도가 당시 김정일을 수행한 중국정부 관계자가 입을 열면서 밝혀졌다.
이 관계자는 “이번 방문에는 ‘신혼여행’이라는 목적도 있었다. 김 위원장은 아름다운 여성과 동행했으며 공식적인 정상회담이나 언론의 사진촬영 때를 제외하고는 늘 그녀와 함께 있었다. 북측에서는 김 위원장의 새로운 부인이라고 설명했다. 특별열차로 이동할 때도 함께 침실을 사용했고 자동차로 이동할 때도 언제나 옆에 앉았다. 그 때문에 가는 곳마다 연회장에서는 김정일의 자리 옆에 ‘김 위원장 부인’의 자리를 하나 더 준비했다. 그녀는 특히 후베이성(湖北省) 우한(武漢)에 있는 마오쩌둥의 별장에서 본 둥후공원(東湖公園) 등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 중국정부 관계자는 가까이에서 본 ‘새로운 부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키는 160cm 정도에 나이는 40세 정도. 정장을 입고 있었으며 이지적인 인상이었다. 중국어나 영어는 못 하는 것 같았다. 김 위원장의 옆에서 중요한 것은 빠뜨리지 않고 메모를 했다.”
지금까지 김정일에게는 네 명의 부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남인 정남을 낳은 여배우 성혜림(2002년 사망), 딸 혜경을 낳은 홍일천, 차남인 정철과 삼남인 정운, 딸 여정을 낳은 재일교포 무용수인 고영희, 나중에 김일성의 여동생 부부에 양녀로 들어간 설송을 낳은 김영숙이다. 그 중에서도 고영희가 ‘정실부인’이라는 것이 정설. 그러나 고영희는 유방암으로 2004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새로운 부인’의 존재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순서로 보면 다섯 번째 부인인 셈이다.
호칭은 ‘옥희 동지’
후지모토 겐지씨는 1983년부터 2001년까지 13년에 걸쳐 북한에서 김정일의 일본음식 전속 요리사로 일했다. <주간겐다이>는 후지모토씨에게 ‘새로운 부인’의 특징을 설명하며 질문하자 곧바로 “북한 간부들이 ‘옥희 동지’라고 부르던 여성이 틀림없다. 그녀는 김정일보다 스물한 살 어린 1963년생이다. 잘은 모르지만 기쁨조의 가수나 무용수 출신도 아니고 고급간부의 딸도 아니다. 그녀는 고영희가 유일하게 공인한 김정일의 비서 겸 애인이었다. 드디어 ‘정부인’으로 승격한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후지모토씨가 전에 북한에서 찍은 그녀의 사진을 중국정부 관계자에게 보이자,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할 때 동행한 여성과 그녀가 동일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지모토씨가 처음 ‘옥희 부인’을 본 것은 87년이었다고 말한다.
“당시 나는 매주 김정일이나 다른 간부들을 위해 일본요리를 만들었다. 가장 빈번하게 연회가 열린 곳은 평양시 중심부에 있는 김정일 관저의 ‘철판구이 코너’라는 연회장이었다.
ㄷ자 모양의 연회장 중앙 좌석에는 김정일이 앉고, 오른쪽에는 허담 외상, 왼쪽에는 고영희와 김정일의 여동생 부부가 앉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느날 가보니 고영희의 지정석에 처음 보는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김정일과 고영희만 사용할 수 있는 프랑스제 고급 식기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다른 간부들도 ‘옥희 동지’라고 부르며 어려워했다. 그 후로도 고영희가 자리를 비울 때는 그녀가 그 자리를 채웠다. 식사 후에는 고영희와 마찬가지로 핸드백에서 간장약 등을 꺼내 김정일에게 건넸다.”
후지모토씨에 따르면 옥희 부인은 김정일 관저에서 1백m 정도 떨어진 간부용 아파트의 최고층에 있는 방 8개짜리 호화로운 집에서 혼자 살았다고 한다. 그곳에서 매일 아침 관저로 출근해서 김정일의 주변 일을 도맡아 했다. 컴퓨터도 능숙하게 다루기 때문에 김정일의 스케줄 관리도 그녀의 몫이었다.
“그녀는 단순한 비서가 아니었다. 김정일의 개인 자금을 관리하는 것도 그녀였기 때문이다. 평양의 관저와 북한 내에 있는 열한 군데의 별장에는 김정일의 호화스러운 집무실이 있다. 그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김정일 본인과 고영희, 그리고 옥희 세 사람뿐이었다. 집무실에는 거대한 금고가 있는데 김정일의 명령으로 간부들이 해외출장을 갈 때 옥희가 금고에서 미국 달러나 일본 엔을 꺼내왔다. 내가 일본으로 초밥 재료를 사러 갈 때에도 1만5천달러(약 1천4백만원)이나 되는 현금을 받았다.”
미식가에 피아노도 능숙
고영희는 가무에 능하고 상냥한 성격의 전형적인 북한 미인이었다. 그러나 옥희 부인도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다시 후지모토씨의 설명이다.
“옥희는 여성적인 매력뿐만 아니라 완벽한 사무처리 능력과 뛰어난 판단력 그리고 과감한 행동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여성이 진한 화장을 하거나 액세서리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옥희도 평소에는 가벼운 화장만 했다. 화려하기보단 청초하고 애교 있는 스타일이었다.
그녀는 노래나 춤에는 서툴렀지만 피아노는 수준급이었다. 원산에 있는 김정일의 별장에서 김정일의 가족과 식사를 할 때의 일이다. 김정일이 갑자기 ‘후지모토가 부르는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다. 나는 ‘이곳에는 노래방 기계가 없어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정일이 ‘옥희가 있잖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옥희는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평양의 연회장에서 내가 몇 번인가 부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김정일과 늘 함께 있어서 그런지 대단한 미식가였다. 초밥 중에서는 참치 뱃살과 성게알을 가장 좋아했다. 한번은 김정일의 명령으로 최고급 닭고기를 사기 위해 도쿄에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닭고기를 구입한 후 평양으로 돌아오자마자 김정일과 옥희에게 닭고기 요리를 해줬다. 옥희는 ‘이렇게 맛있는 닭고기 요리는 후지모토씨밖에 만들 수 없을 것’이라며 내 잔에 술을 따라줬다. 북한 여성은 보통 남편에게만 술을 따르기 때문에 나는 옥희의 마음씀씀이에 감격했다.”
김정일은 옥희 부인을 비서 겸 애인으로 24시간 곁에 뒀다. 후지모토씨는 그들의 개인적인 순간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무엇을 할 때건 ‘옥희, 옥희’라며 그녀를 찾았다. 그러면 그녀는 김정일에게 다정하게 다가갔다. 예를 들어 수영을 좋아하는 김정일이 원산 초대소의 이동식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에도 그녀는 김정일의 바로 뒤를 따라 헤엄쳤다.
평양 교외의 강동에 있는 32호 초대소에는 롤러스케이트 트랙이 있다. 김정일은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트랙을 도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때도 역시 옥희가 뒤를 따랐다. 더구나 몇 바퀴나 달린 후에 피곤할 텐데도 미소를 잃지 않는 점에 놀랐다. 유일한 예외는 승마였다. 옥희는 승마를 못 해서 김정일이 말을 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곤 했다.
연회에서 김정일은 옥희가 따르는 고급 브랜디를 마시고 취기가 돌면 ‘옥희’라고 속삭이며 그녀의 퍼머머리를 만지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옥희는 얼굴이 붉히며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1995년 겨울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김정일이 직접 전화를 걸어서 ‘지금 당장 차로 관저 입구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령했다. 놀라서 집을 나와 급히 차를 몰고 가자 김정일이 직접 벤츠를 몰고 나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조수석에는 옥희가 앉아 있었다. 김정일은 직접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나는 두 사람의 데이트에 보디가드로 따라간 것이었다.
김정일과 옥희를 태운 벤츠가 향한 곳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신천(信川)의 별장이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별장의 김정일 관저에 머물고, 나는 그 옆의 건물에서 밤을 보냈다.
옥희에 관한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광경이 있다.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하자 국가적인 장례식이 거행됐다. 나는 간부들만 참석할 수 있는 추도식에 유일하게 참가한 일본인이었다. 그때 큰 기둥 뒤에서 한 여성이 손수건을 들고 흐느끼고 있었다. 옥희였다. 애인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에는 나오지 못하고 기둥 뒤에서 숨어 있었다. 다정한 옥희의 상심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고영희와 자매처럼
앞서 언급했듯이 옥희 부인은 고영희가 유일하게 공인한 애인이었다. 이는 그녀의 성품이나 능력의 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고영희가 사망한 후 옥희 부인이 정부인의 자리에 앉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후지모토씨는 “나는 1988년부터 김정일의 놀이상대도 겸하게 돼 김정일과 자주 바카라를 했다. 그럴 때는 늘 김정일과 내가 백군, 고영희와 옥희가 홍군이 되어 게임을 했다. 두 사람은 마치 자매처럼 사이가 좋아서 고영희가 해외여행을 갈 때에는 옥희에게 ‘아빠를 잘 부탁해’라고 말할 정도였다. 고영희가 낳은 세 아이도 어렸을 때부터 옥희를 잘 따랐다.
2년 전에 고영희가 사망하면서 옥희가 명실상부한 정부인으로 승격한 것 같다. 고영희는 나중에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옥희가 김정일의 아이를 갖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옥희에게는 자식이 없지만 고영희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옥희는 김정일의 정부인으로서 북한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훌륭히 해나갈 것이라고 본다”며 말을 맺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