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브래드포드 | ||
지금 미국에서는 대대적인 ‘사람 찾기’가 한창 벌어지고 있다. 집 나간 가족을 찾거나 오래 전에 헤어진 동창을 찾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 찾기’의 목적은 섬뜩하게도 살인 사건의 희생자들을 찾는 것. 그것도 20년 전에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의 피해자들을 찾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진을 찍은 사람이 모두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사진을 찍은 장본인이자 살인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사람은 지난 80년대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하던 윌리엄 리처드 브래드포드(60)라는 이름의 남성이다. 이미 그는 1988년 두 명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18년 째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 경찰은 사진 속의 여성들 중 상당수가 그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미 전역에 걸쳐 신원 및 소재 파악에 나선 상태다.
그렇다면 경찰은 왜 2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수사를 재개한 걸까. 범인은 오래 전에 잡혔건만 이제야 희생자들을 찾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은 어떻게 벌어진 걸까.
지난 1984년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던 브래드포드는 당시 이웃집 소녀인 트레이시 캠벨(15)을 목 졸라 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캠벨이 죽기 직전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된 데다 당시 그가 강간범으로 체포되었다가 보석금으로 풀려 나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아파트를 수색한 경찰은 놀라운 증거물을 획득했다. 최근에 찍은 듯한 캠벨의 사진이 다량으로 발견된 것이다. 게다가 놀랍게도 최근 후미진 뒷골목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시체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한 여성의 사진도 함께 발견되었다. 수사 결과 이 여성은 바에서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셰리 밀러(26)라는 여성이었으며, 역시 살해되기 직전 브래드포드와 함께 바를 나서는 모습이 여러 사람에 의해 목격되었다.
이밖에도 당시 경찰은 그의 아파트에서 여러 명의 여성들을 모델로 찍은 사진첩도 함께 발견했다.
▲ 살인범 브래드포드의 사진첩에 남겨진 54명의 여성들. 78년 살해당한 28번째 여성도 그가 저지른 범행으로 추측되고 있다. | ||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그녀를 LA 북쪽의 사막 지대에 위치한 한적한 야영지로 데리고 갔다. 몇 번 사진을 찍는가 싶더니 이내 본색을 드러낸 그는 밀러를 성폭행한 후 결국 목 졸라 살해하고 말았다. 더욱 엽기적인 것은 그가 그녀의 몸에 있는 문신들을 도려낸 다음 시체를 토막 냈다는 것이다. 도려낸 문신은 그가 기념으로 간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토막 낸 시체를 인적이 드문 골목에 버리고 달아난 그는 불과 며칠 후 다음 범행을 모색했다. 이번에는 이웃집에 사는 소녀인 캠벨에게 다가가 “넌 모델이 될 만한 충분한 재능을 갖고 있어. 내가 도와줄게”라면서 유혹했다. 자신의 직업을 십분 활용한 그는 캠벨 역시 같은 장소로 데려갔다.
처음에는 이런 저런 포즈를 취하라는 둥 제법 사진작가인 양 흉내를 냈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캠벨을 성폭행한 후 목 졸라 살해한 그는 이번에는 시체를 사막의 바위 틈에 버린 채 돌아왔다.
밀러와 캠벨을 살해한 혐의로 긴급 체포된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강간 혐의로 8년 형을 선고받는 한편 두 건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4년여의 재판 끝에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형을 선고받던 날 브래드포드는 배심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여러분이 알지 못하는 또 다른 희생자들이 얼마나 많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지만 당시 경찰은 브래드포드가 이미 사형을 선고 받은 만큼 그에 관한 모든 수사를 마무리 짓기로 결정했다. 아직 잡지 못한 다른 살인범들을 찾는 데 경찰 인력을 투입하는 게 더 현명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까닭에 당시 그의 아파트에서 압수했던 사진 속의 여성들의 생사 여부는 전혀 수사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며, ‘브래드포드 살인 사건’은 그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LA 경찰은 오래 묵은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수사를 재개하고 있다. 한 형사가 오래 된 사건 파일을 정리하던 중 브래드포드의 사진첩을 발견하고는 뒤늦게 재수사에 대한 의지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더 많은 여성들이 비슷한 수법으로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경찰은 언론을 통해 54명의 여성들의 사진을 배포한 후 ‘사람 찾기’에 나섰다. 다행히도 사진이 공개되자 미 전역에서 제보 전화나 이메일이 쏟아졌다.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여성들은 모두 28명. 이 중 26명은 무사히 살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반면 한 명은 불행히도 이미 오래 전에 살해당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또 다른 한 명은 아직까지도 행방불명인 상태다.
살해된 것으로 확인된 여성은 사진 속 ‘28번’ 여성으로 이름은 도날리 더하멜이다. 두 아이의 엄마였던 그녀는 지난 1978년 말리부 협곡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시체가 발견되기 며칠 전 그녀가 ‘프리깃’이라는 바에서 브래드포드와 함께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브래드포드는 살인죄로 기소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또한 사진 속 여성들 중 세 명은 브래드포드의 전 부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현재 사진 속 여성들의 신원 파악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 몇 명의 여성들이 더 살해당한 것으로 밝혀질지는 아직 미지수. 살아 남은 여성들은 “나도 희생자 중 한 명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진다”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한편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브래드포드는“사진작가의 집에서 모델들의 사진이 발견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 사진들을 살인과 연관 짓는 것은 억지”라면서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