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이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이 에세이를 쓴 작가는 반도 마사코(48). 나오키상을 수상한 저명한 문필가며, 자신의 소설 <시코쿠>가 영화화되어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녀는 현재 8년째 타히티에서 생활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닛케이신문>에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이번 소동의 발단이 된 에세이 ‘새끼 고양이 죽이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런 내용을 쓰면 얼마나 규탄을 받게 될지 알고 있다. (중략) 그것을 알면서도 밝히자면, 나는 새끼 고양이를 죽이고 있다. 집 옆의 절벽 아래가 마침 공터이기 때문에, 태어나자마자 그곳에 갖다 버리는 것이다.”
그녀는 세 마리의 암컷 고양이를 자유롭게 풀어 기르고 있는데,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을 모두 기를 수 없고 맡아서 길러줄 사람을 찾을 수도 없어서 죽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아예 고양이가 새끼를 낳을 수 없도록 불임수술을 해주면 되지 않을까. 이에 대해 그녀는 “암고양이가 생식행위를 통해 새끼를 낳는 것이 본질적인 삶이다. 그것을 인간의 편의 때문에 빼앗아도 될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녀에 따르면 피임수술을 하는 것은 결국 “씨앗을 죽이느냐 생긴 새끼를 죽이느냐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
그녀는 “나는 내가 키워온 고양이의 충실한 ‘삶’을 선택했고,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새끼 고양이를 죽일 것을 선택했다. 물론 그에 동반하는 고통과 슬픔도 받아들여야 했다”고 글을 맺는다.
이 에세이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애묘가’를 자청하는 사회 저명인사들까지 이 논란에 가세하면서 소동은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상태다. 일본의 5대 일간지는 물론 스포츠신문을 비롯하여 주간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언론이 이 논란에 동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한 인기 블로거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렇다면 인간이 피임을 하고 섹스하는 것도, 피임하지 않고 섹스해서 생긴 아기를 중절수술로 없애는 것과 ‘결국엔 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하는 짓은 태어난 아기를 죽이는 것이니 중절수술보다도 악질이다”라는 내용을 올려 많은 네티즌들의 호응을 얻었다.
▲ ‘새끼 고양이 죽이기’ 논란을 기사화한 일본 <주간포스트> 지면. | ||
그러나 그녀를 규탄하는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비난 일색이었던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애완동물을 키우는 주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내린 어려운 결정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옹호론을 펼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있는 것.
그녀와 친분이 있다고 밝힌 다른 작가는 “이 에세이는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감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집에서 키우다가 주인의 변덕으로 버려지는 유기견 등의 숫자는 한 해에 40만 마리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 대부분은 보건소 등에 의해 잡혀가 ‘처분’된다. 실제로 보건소 직원 중에는 “키울 수 없다면 버리지 말고, 주인이 직접 죽이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지닌 사람들도 많다는 것.
즉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충분히 고려한 후 주인으로서의 책임을 다 하기 위해 내린 그녀의 결정에 대해 타인이 왈가왈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옹호론의 요지다.
그러나 지난 8월 23일 그녀가 과거에 강아지를 죽였다는 뉘앙스의 에세이를 쓴 것이 알려지면서 용기를 내서 옹호론을 펼친 사람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고양이 죽이기’보다 한 달 전인 7월 18일의 <닛케이신문> 에세이는 그녀의 다른 애완동물인 개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녀는 세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는데, 그 중 두 마리는 암수 독일 셰퍼드고 나머지 한 마리는 잡종이다. 암컷 셰퍼드와 잡종 개는 모녀(母女) 사이로, 발정기가 같아 같은 시기에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한꺼번에 많은 새끼가 태어나다보니 어미개들도 어느 것이 자신의 새끼인지 혼동되어 새끼를 두고 싸움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결국 두 마리로부터 태어난 강아지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문제의 부분은 그 다음이다.
그녀는 “이후 또 한번 동시에 출산을 했기에, 눈물을 머금고 타마(잡종개)의 새끼를 태어나자마자 모두 처리했다”고 썼는데, 문맥으로 봤을 때 ‘처리했다’는 것이 ‘죽였다’는 뜻임은 분명해 보인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결국 혈통 좋은 강아지는 남겨두고 잡종개만 죽인 것이 아니냐”며 비난하고 있다.
자신의 에세이가 큰 파문을 일으키자 그녀는 타히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왔다. “타히티에 살기 시작한 지 8년. 그동안 사람과 동물을 모두 포함한 의미에서, ‘삶’ 나아가서는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됐다. 7월부터 시작한 <닛케이신문> 지면의 연재도 그런 관점에서 자연스럽게 주제가 결정됐다. ‘고양이 죽이기’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동물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자세에서 나의 생각을 표명했다. 삶의 의미가 불분명해진 현대사회에 있어 큰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일부에서는 “자신의 글에 임팩트를 주기 위해 소설가적인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이 많은 사람들의 반발과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