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다폰을 인수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사장. 그의 막강한 IT 영향력을 토대로 휴대폰 사업의 성공 여부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지난 10월 30일 손정의 사장의 대국민사과가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현재 그의 명성은 전산시스템 고장, 거품광고 의혹과 함께 크게 실추된 상 | ||
10월 24일, 국내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휴대전화번호계속제도’(번호이동성제도)가 일본에서 드디어 시작됐다. ‘번호포타빌리티’라고도 부르는 이 제도는 간단히 말해서 가입 중인 휴대폰 회사를 다른 데로 바꿔도 지금의 번호를 그대로 쓸 수 있는 것. 제도 시행 직전 일본 업계는 폭풍전야에 휩싸였다.
일본의 휴대폰업계는 도코모, 에이유, 보다폰(소프트뱅크사가 인수. 소프트뱅크모바일로 바뀜) 3개 회사. 이 중에서 도코모 가입자가 가장 많아 전체 시장의 55.5%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에이유, 소프트뱅크 순이다. 만년 2위인 에이유는 30%대를 넘지 못하는 가입자 수를 35%까지 끌어올리려고 절치부심.
가입자 수가 점점 줄어들던 보다폰은 소프트뱅크로 바뀐 뒤 20%대의 도약을 노리고 있었다. 이들 업체에게도 번호포타빌리티는 세를 늘리는 절호의 비즈니스 찬스. 어림직작으로 1000만 명 이상이 휴대폰 회사를 바꿀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엄청난 시장 싸움에서 과연 누가 웃을 것인가, 소비자들도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번호포타빌리티 실시를 하루 앞둔 지난 10월 23일의 저녁 뉴스 시간. 일본 전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저녁 6시 30분쯤부터 도쿄 시내의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사장이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띤 채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그의 발언을 요약하면 “일본은 세계에서 휴대폰 요금이 제일 비싸다. 인터넷을 생각해 보라.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데도 거의 무료다. 소프트뱅크는 이런 당연한 일들을 휴대폰에서도 시행하겠다. 소프트뱅크 휴대폰 사용자들끼리는 통화료와 문자메시지 이용 요금을 0엔으로 한다”는 이른바 신요금제도인 ‘예상외 할인요금, 0엔’선언.
뉴스를 보던 시청자들은 우선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도 이전에 ‘요금 0엔’이라는 구절에 귀가 번쩍했다. ‘과연 손정의! 일냈구나 손정의! 이로써 휴대폰 요금에도 가격파괴라는 돌풍이 몰아치는구나!’ 물론 뉴스캐스터들이야 이보다 좀더 고상하고 전문적인 표현을 곁들였지만 그 속내는 일반 시청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이 표정에 확연히 드러나 있었다.
소트프뱅크의 ‘요금 0엔’ 선언은 경쟁사는 물론 자사에게도 독약 처방임은 확실했다. 사실 전부터 경쟁사들은 소프트뱅크, 엄밀히 말하면 손정의가 어떤 깜짝쇼를 들고 나올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소프트뱅크가 보다폰을 인수하면서 껴안은 1조 엔 이상의 채무를 변제하려면 요금인하경쟁이나 일시적이더라도 적자가 예상되는 수단을 택하기는 무리라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자칫하면 비즈니스 모델 자체가 무너져버리는 이 결단에 손정의 역시 신중에 신중을 기했으나 결국 도박에 가까운 패를 던진 것이다.
▲ ‘0엔 요금’을 선언하는 손정의 사장(왼쪽)과 신문광고. 오른쪽 신문 전면광고 맨 밑에 ‘0엔 요금’의 주의사항이 깨알 같은 크기로 적혀있다. | ||
에이유는 젊은층에 어필하고 있는 특성을 감안, 기존모델인 여배우 나카마 유키에(仲間 由紀惠)와 모코미치의 사진에 ‘휴대전화번호포타빌리티 오늘 스타트! 번호는 그대로 에이유로 와’라는 카피를 달았다.
소프트뱅크는 전날까지 보안유지에 만전을 기했던 탓일까, 이날 광고를 내지는 않았다. 다만 손정의 사장의 ‘0엔 선언’이 각 매체 주요 뉴스로 고르게 오르고 어떤 신문에는 사진까지 곁들여 실려서 광고비 한푼 안 쓰고 톡톡히 광고 효과는 챙기는 수완을 발휘했다.
소프트뱅크의 전면광고가 신문에 등장한 것은 26일. 가운데 빨간 글씨로 ‘¥0’이라고 깔았는데 글자 하나가 대강 가로 16㎝에 세로 22㎝쯤. 무지막지하게 강렬한 인상이었다. 본문 글씨 하나하나도 각각 1㎝가 넘었다. 소프트뱅크 손정의라는 이름 표기는 본문 글씨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도 경쟁사들의 반응은 의외로 냉정하고도 침착했다. 소프트뱅크의 ‘요금 0엔’에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문제는 명확했다. 위의 전면광고의 제일 아래, 난외 부분에는 실제 신문을 보아도 깨알만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글자들이 두 줄 딸려있다. 이른바 주의사항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을 꼼꼼히 읽고 조금 생각해보면 소프트뱅크가 말하는 ¥0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결론은 이렇다.
¥0이라 하더라도 매월 기본료는 내야 한다. 2007년 1월 15일까지 가입자는 2880엔, 이후 가입자는 9600엔. 9600엔이라면 도코모나 에이유보다 기본료가 엄청 비싸다. 또한 ¥0은 소프트뱅크 사용자끼리만 가능. 이것도 밤 9시에서 1시 사이의 통화가 월 200분이 넘으면 초과분에 대해서는 30초당 21엔의 요금을 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타사의 휴대폰을 쓰는 사람한테 거는 통화료는 경쟁사들보다 요금이 훨씬 비싸다. 이밖에도 ¥0이 도코모나 에이유보다 싸지 않은 이유가 몇 가지나 더 있다.
그러다 보니 경쟁사들이 허둥지둥 요금인하로 맞불을 놓을 필요가 없다. 손정의 사장은 “몇 명이서 단체로 소프트뱅크에 가입하면…” “소프트뱅크 계약자들끼리 쓰는 통화가 70%가 넘으면…” 훨씬 싸다고 강조하지만, 왠지 ¥0에 걸었던 기대가 거품이었다는 생각이 커진다.
결전은 계속됐다. 휴대폰 3사는 연일 캠페인과 이벤트로 분위기를 띄우며 가입자 유출 방지와 전입 환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고객이 몰리는 첫 주말인 28일 오후. 소프트뱅크의 전산시스템이 고장을 일으켰다. 신규가입이나 기종변경 등의 계약업무가 중지되고 타사로의 전출 업무도 마비되었다. 29일 오전에는 복구되는 듯했으나 정오를 지나서 또 다시 마비.
자사만이 아니라 경쟁사의 업무,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입 예정자들에게 막대한 지장을 일으킨 이 예상밖의 고장에 대해 소프트뱅크 측은 “신규가입자 폭주로 인해”라는 말로 일관되게 해명했다. 그러나 충분히 예상하고 대비했어야 한다는 각 방면의 비난을 피해갈 수는 없는 일. 결국 30일, 손정의 사장은 해명 기자회견을 하면서 관계 경쟁사와 고객에게 사죄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예상밖의 복병 출현으로 소프트뱅크로서는 경쟁사의 고객을 끌어들이기는커녕 자사의 기존고객마저 잃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에 몰렸다. 더군다나 경쟁사에서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도코모와 에이유는 소프트뱅크의 ‘¥0’ 광고 내용이 경품표시법에 저촉되는 부당표시에 해당한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정보를 제공했다.
소프트뱅크에서는 이 조사를 받아들여 지난 1일, 이번 주말부터 시행되는 TV와 신문, 점포 등의 광고 표기방법을 바꾸겠다고 방침을 발표했다. 소비자의 오해를 사는 표기는 지양하되 광고 내용은 바꿀 예정은 없다는 것이다. ‘¥0’의 허와 실이 이만큼 분명해진 마당에서 소프트뱅크와 손정의 사장은 무슨 방법으로 이 리스크를 감수하고 위기를 극복할지 궁금해진다.
송미혜 일요신문재팬 기자 ilyo-japa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