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사법부에 저항하는 이상한 놈들이 많아. 어떤 놈은 손가락을 잘라 보냈더라구. 재판이 불리해 지니까 회칼을 보낸 놈두 있구. 그걸 알리면 신문에 나고 시끄러워지니까 조용히 했지. 직접 말은 안했지만 대신 판결로 골로 보냈지. 직접 얘기는 안했지만 판결이유를 말할 때 본인이 알 수 있도록 메시지는 보냈지.”
엘리트 출신으로 오랫동안 판사를 한 사람을 보면 겉은 아주 예의바르고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의 본체에서는 온통 얼음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느낌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 성공한 법관의 철학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그를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진실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적 진실과 법원이 보는 진실은 달라요.”
“진실이 두 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요 법원이 보는 진실이 따로 있어요.”
“법원이 보는 진실이란 뭡니까?”
“기록을 통해 스크린 한 사실에 논리와 추론으로 법원이 만든 결론이죠.”
“논리적으로 법관이 그가 살인범이라고 하면 그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도 그는 살인범이어야 하는 게 절대적 진실 말고 또 있는 법원의 진실이란 말이죠?”
“이 보세요. 법원의 업무에 한계가 있는데 어떻게 절대적 진실을 다 파헤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젊어서부터 법관생활 평생 해오면서 느낀 건 법원은 진실을 규명하는 데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실을 규명하지 않으면 뭘 하는 건가요?”
“판사는 진실보다는 사회의 갈등을 조절하고 매듭을 짓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잘못 매듭이 지어지는 일이 현실에서 많은데 잘됐던 못됐건 그냥 뚜껑을 덮어 묶어버리면 되는 건가요? 사회의 갈등원인을 매듭을 짓는다고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사형에 처하면 그것도 갈등을 종결시키는 건가요?”
그와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나에게 그는 짜증이 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러면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한 사건을 가지고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끊임없이 절대적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겁니까? 나는 이 세상에 절대적인 진실은 없다고 생각해요. 얼마 전에도 엔지니어출신으로 원칙론자인 사람이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으러 왔어요. 내가 더 버티면 징역형을 주겠다고 하면서 잘못했다고 하라고 했는데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버티는 거예요. 참 답답한 친구더라구. 나는 사람들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말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판사의 오판도 그러려니 하고 감수하라는 것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가도 힘이 약해서 그러려니 하고 가만히 있으라는 얘기였다. 그게 판사들의 인식이라면 차라리 인공지능을 재판장 자리에 앉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울함과 고통을 당한 사람은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예민하다. 평생을 법관으로 대접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턱없는 자기기만 속에서 진실에 둔감한 것 같다. 수많은 법서보다 아픔을 당한 경험이 훨씬 좋은 법관들을 만들어 낼 것 같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