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떨어지면 탈수현상이 생길 수 있으니까 오줌이라도 대신 마시도록 하세요.”
터널속의 남자가 그 말을 듣고 구조대원에게 물었다.
“먹어 보셨어요?”
구조대원은 처음 받아보는 질문이었다. 잠시 당황하다가 “아니요”라고 대답한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정말 그런 상황이 왔다. 구조대원은 화장실에 가서 자신의 오줌을 받아 마셔본다. 직접 체험해 본 것이다. ‘터널’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성경 속에서 극한의 파멸에 이른 욥을 위로하러온 친구들은 그럴듯한 도덕론만 얘기한다. 뭔가 뒤에서 잘못을 했으니까 하나님이 그런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단정한다. 욥은 그런 무정한 친구들을 보며 가슴을 친다. 아무리 아파도 가족조차도 그 아픔을 공감하기 힘들다. 그게 세상인 것 같다.
변호사를 하면서 붕괴된 인생의 터널 속에 갇혀 절규하는 수많은 인생들을 봤다.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여 검찰청 계단을 오르내리는 죄수들을 봤다. 그들이 아무리 억울하다고 해도 그 마음이 내게 전달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인간에서 다른 부류로 추락한 존재로 착각한 적도 있다. 그러다가 내가 된통 당했다.
한 여자가 이혼소송을 맡겼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변호사인 내가 남편한테서 뇌물을 받고 자기의 소송을 망치고 있다는 의심을 했다. 그녀의 의심은 확신이 되고 바위같이 굳어졌다. 약자인 여자의 입장에서 워낙 확신을 가지고 말하니까 주변에서 그녀를 믿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에 대해 민형사소송을 제기했다.
담당형사는 늙은 변호사인 나를 벌레 보듯 했다. 법만 없으면 지하실로 끌고 가 때려죽일 것 같은 공포가 엄습했다. 젊은 검사는 온갖 수모를 주었다. 법원도 냉냉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워낙 일관되게 나의 잘못을 얘기하니까 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인권의 보루인 대법원까지 나는 죄인이 되어 올라갔다.
대법관들은 뭔가 잘못이 있으니까 그 여자가 그렇게 집념을 가지고 오랫동안 덤벼든 것이라고 추정했다. 아이는 장난이지만 그 돌을 맞는 개구리는 죽는다. 대법관은 아이고 나는 그 돌에 맞아야 하는 약한 개구리의 운명이었다. 내가 내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주관적인 감정에 치우칠 것 같아 로펌의 변호사들을 선임했다.
그 변호사들만은 그저 나의 아픔에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 역시 아니었다. 대법관이 뭔가 당신이 잘못했다고 추정을 하니까 잘못한 걸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내가 몸을 담고 밥을 먹었던 법조계의 현실이었다. 변호사인 나는 그 오만과 편견의 그물을 벗어날 수 없었다.
참 원망스런 대법관 두 명을 만났다. 한명은 법조계에서 어떤 사안도 자기의 법 논리로 파괴시킬 수 있다는 우월감을 가진 가진 대법관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예전에 내가 자신에게 덤벼들었다는 걸로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사람이 추락을 하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주변에 몰려드는 것은 변호사까지도 모두 악마 같았다. 돈 때문에 겉으로는 상업적미소를 지어도 그 뒤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나는 법의 몽둥이를 흠씬 두들겨 맞고 떡이 되어 바닥에 널 부러졌다. 억울한 누명에 배상금까지 물게 됐다. 물질적 손해 보다 더 아픈 것은 가슴을 면도날로 긋는 것 같은 누명이었다. 영화 속 소방관이 오줌을 먹어보듯이 변호사인 나는 누명을 써 보는 고통을 체험했다. 그리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지금은 의뢰인을 보면 제일 먼저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이해해 주려고 한다. 그게 첫째다. 함께 아파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것이 뭐든지 다 소리 나는 구리고 울리는 꽹가리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