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때 문예반을 했는데 두 살 아래의 후배가 있었어. 그 누나는 연극인이고 장관도 지내고 글도 쓰고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유명인사지. 아버지가 돌보지 않는 바람에 남매가 고생을 하고 자랐어. 그 후배가 문학적 재주가 있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일찍 당선이 됐어. 그런데 작가가 되지 않고 건설회사에 취직해서 회사원이 된 거야.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었지.”
하나님한테 재능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싹이 트는 것 같다. 소설가 황석영 씨의 자전을 읽으면 십대 말에 북한산 자락의 바위아래 동굴에 들어가 참선을 하면서 단편소설 ‘입석부근’을 써서 사상계잡지 공모에서 입선을 했다. 소설가 최인호씨도 고교시절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다. 산책을 같이 하는 선배가 말을 계속했다.
“얼마 전 수십 년 만에 그 후배 소식을 들었는데 말이야 그 후배가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나이가 들어 뇌경색이 와서 심각하게 반신마비가 온 거야. 나름대로 재활하려고 이를 악물었대. 중풍이 오니까 자신의 존재의미가 뭔가 따져보게 되고 다시 글을 쓰게 됐다고 하더라구.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꺽었던 펜을 들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대. 그렇게 쓴 소설로 미국현지의 이민자들한테 주는 문학상도 받았고 내게 책을 보냈더라구. 그 후배는 이제 치매 증상까지 온다고 하더라구. 그런 상황에서도 하루하루 글을 쓰는 것 같아.”
선배가 전하는 말에는 가슴 뭉클한 메시지가 있었다. 사람마다 자기의 존재자체인 그 무엇이 있었다. 늙고 병이 들어 글을 쓴 그 사람은 건설회사의 회사원이 아니라 작가였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과 몸속의 에너지를 짜내어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내가 임종을 옆에 지켜본 강태기 시인도 그랬다. 십대시절 공장직공으로 있으면서 두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모두 당선이 됐다. 그는 글을 쓸 계획을 착실히 세웠다. 젊은 시절 인도 등을 방랑하면서 내공을 보다 확실히 한 뒤에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기로 했다. 그러나 막상 글을 쓰려고 시도하려는 나이가 됐을 때 갑자기 암이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의 병실을 찾아간 내게 죽음을 앞 둔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엄형, 글은 말이죠. 나중에 쓴다고 하지 말고 그때그때 바로 쓰세요.”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그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삶은 물거품 같이 스러지는 허무한 것이라고 하지만 예술가들은 자신의 영혼을 글로 그림으로 또는 소리로 바꾸어 영원히 존재하고 싶은 것 같다. 따지고 보면 그 쪽이 한 줄의 관직명이나 화려한 묘지나 비석으로 가지고 가지 못한 재물을 자랑하는 것 보다 낫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