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젊은 변호사를 선발하는 면접을 하려고 하는데 함께 해 줄 수 있어요?”
선배 변호사는 용기 있는 젊은 변호사를 구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자신의 사재를 털어 생활비를 지원하면서 그 대신 서울역 노숙자들 속이나 탑골공원의 노인들 사회에 들어가 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좋은 선배변호사들이 더러 존재했다.
내가 변호사를 처음 개업했을 때였다. 당시만 해도 공산권인 중국과의 문은 꽉 막혀 있었다. 몰래 국내에 들어온 중국에 살던 여성동포 한 사람이 출입국관리소 직원들에게 검거되어 쫓겨나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끝까지 중국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북한국적도 거부했다. 중국내에서 무국적자였다.
문화혁명당시 그녀는 중국인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따귀도 맞았다. 나는 그녀를 위해서 행정소송도 제기하고 외무부에도 항의했었다. 힘없고 가난하고 의지할 곳 조차 없는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보람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방 후 반공검사로 유명하던 오제도변호사가 그 무렵 살아 있었다. 내가 하는 변호를 전해들은 칠십대의 오제도 변호사는 내게 생활비를 지원할 테니까 같이 사무실에 있자고 제의를 했었다. 왜 그렇게 하시려고 하냐고 물었다.
그는 의인을 돕는 건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이라고 했었다. 작고 마른 노인의 속에는 어떤 알지 못할 에너지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 얼마 후 그는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삼십 여년이 흘렀다. 이웃의 선배변호사가 바른 일을 하는 젊은 변호사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 소파에는 삼십대 초쯤의 훤칠한 남자가 와서 앉아 있었다. 노숙자 속으로 뛰어 들 테니 얼마간의 생활지원금을 달라고 신청을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뭘 하세요?”
선배 변호사가 가정환경을 물었다.
“아버지는 원래 젖소를 키우셨는데 외환위기 때 망해 아파트 경비가 되시고 어머니도 파출부를 나가십니다.”
“형제들은요?”
“삼형제인데 큰 형은 목사입니다. 어머니가 맏아들은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하셨는데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변호사가 됐고 동생은 파주에 있는 디스플레이를 생산하는 공장에 직원으로 다닙니다.”
그를 보면서 선배 변호사가 자신이 하는 일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희 부부는 빛이 될 수 있는 젊은 변호사들을 우리사회의 그늘진 곳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하려는 일이 힘들고 초라해 보이지만 궁극에 가서는 그렇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미국대통령 오바마도 로펌의 고액연봉을 포기하고 할렘가에 들어가 삼년간 일했어요. 그런 일을 하면 돈보다 몸으로 얻는 귀중한 게 있다고 봅니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젊은 변호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옆에 앉아있던 내가 끼어들어 물었다.
“힘든 환경에서 자라나 이제 변호사가 되니까 잘먹고 잘살고 싶지 않습니까? 결혼해서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고 애도 키워야 하는 게 현실이죠. 이상과 현실은 달라요. 좋은 일을 해도 세상은 칭찬하지 않아요. 의심하고 오히려 모욕을 주고 침을 뱉을 때도 있죠.”
“괜찮습니다. 어려서부터 많이 당해 봤습니다. 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어디에다 의미와 가치를 두느냐에 귀착할 것 같습니다. 잠시지만 인도와 네팔에 가서 봉사한 적도 있습니다. 이제 변호사란 지위를 받았으니까 거기에 합당한 소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혼자 돈을 벌어 잘살라고 하나님이 자격증을 주신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몇 주 후 나는 서울역 앞 노숙자들이 모여드는 허름한 건물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방에 몇 개의 탁자가 놓여 있었다. 노숙자 급식소였다. 그 앞에서 노숙자들이 말없이 카레라이스를 입에 넣고 있었다. 급식소 뒤쪽 칸막이 사이에 젊은 변호사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는 노숙자 한 사람과 얘기를 하고 있었다. 변호사란 어떤 직업일까. 돈의 위력으로 법위에 군림하려는 악마들의 머슴이 되어야 할까. 아니면 법 밖으로 밀려나 보호받지 못하는 투명 인간들의 천사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악마도 천사도 다 될 수 있는 직업이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