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제시대 학병으로 차출되어 중국의 소주까지 끌려갔어요. 해방이 되고 현지에서 제대를 했는데 중국대륙을 걸어서 관통해서 서울까지 왔어요. 힘이 없고 가난해도 자기의 나라를 가진다는 건 좋은 겁니다.”
그의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아마도 몸으로 차별을 강하게 체험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음식을 씹으면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해방이 된 서울에서 나는 옷 한 벌이 없었어요. 계급장을 뗀 일본 군복을 그대로 입고 일본 군화를 그대로 신고 고시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판사가 됐죠. 4.19가 일어나고 5.16이 일어났는데 정치범을 재판하게 됐어요. 데모대가 법원 앞까지 와서 석방하라고 난리를 치고 군인들이 판사실까지 와서 압력을 넣기도 했어요. 독립해서 바른 판단을 할 환경이 되지 못했어요. 그래서 사직서를 냈죠.”
갈림길에 섰을 때 그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지를 에둘러서 알려주었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옳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는 신발을 털고 나가라는 뜻이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나는 뼈 속에 새겨 두고 있었다. 변호사로서 그의 일상은 나에게는 교과서였다. 오후가 되면 그는 예약한 의뢰인 한 두 명 정도 상담을 했다. 그리고는 창가를 걸으면서 법원에 제출할 서류에 어떤 문장을 쓸 것인가를 구상했다. 구상이 끝나면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썼다. 쟁점이 요약된 문장이었다. 법관시절 그는 실력파로 평이 났었다. 판사들 사이에서 변호사인 그가 제출하는 준비서면의 문장을 그대로 베끼면 좋은 판결문이 된다는 평가였다. 유능한 변호사는 아무리 복잡한 사건이라도 단순화 시켰다. 동시에 그 문장에는 영혼이 들어가 있었다. 어느 날 오후 그는 내게 이렇게 경험을 얘기했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한다고 할 때 모두 옆에서 밥을 벌어먹기가 힘들 거라고 걱정을 해 주었어요. 내가 원래 사교성이 없어서 사람들과 사귀지를 못하거든요. 동료판사나 검사들을 만나 술이나 밥을 사주기도 해야 하고 또 로타리 클럽 같은데 가서 사람들을 만나기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말이예요. 그런데 변호사를 해 보니까 그런 사교성이 없어도 다 먹고 살수 있습디다. 진실하게 일해주면 사람들이 그걸 보고 다 와요. 또 늙으면 손님이 없어진다고 걱정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의뢰인이 같이 늙어가면서 나의 손님이 되어 주니까 말이요.”
너무 사업적으로 행동하지 말라는 훈계였다. 그 후 나는 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이따금씩 그 스승변호사와 법정에서 마주칠 때 인사를 하곤 했다. 어느 날 그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처럼 일을 하다가 병원에 들어가 조용히 저 세상으로 가셨다고 했다. 이제 내가 당시 그 분의 나이를 넘어선 변호사가 되어 있다. 어느새 나는 스승변호사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나도 새로 변호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준다. 세상과 돈을 따라가지 말고 소란한 도시 속에서도 은자의 체념을 이해하라고 한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