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법에서 열린 파기환송심 선고공판에 출석하며 지지자들로 부터 거수경례를 받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댓글부대’를 동원해 정치활동을 벌이고, 이 과정에서 제18대 대선에 개입한 혐의(국정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파기환송심 재판부(서울고법 형사7부)는 법리적인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제3의 방법(공모 인정)으로 유죄로 판단하고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로써 ‘1심-2심-대법원(환송)-2심 파기 환송심’ 4년여에 걸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네 번째 재판이 마무리 됐는데, 이는 대법원이 사건을 2심으로 돌려보낸 지 2년 만에 나온 결과다.
파기 환송심답게 법리적 판단은 대법원의 취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공직선거법 위반을 입증할 핵심 증거 파일들의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대신 판단은 달랐다. ‘특정 정당과 정당인을 지지하는 글은 정치 관여 행위로 볼 수 있고 순차로 공모했다’며 국정원법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두 혐의 모두 유죄로 봤고, 정치 관여로 볼 수 있는 트위터(SNS) 수도 1심보다 많은 391개를 인정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부장판사 김대웅) 재판뿐 아니라, 사건 전체를 판단하는 ‘키’가 됐던 공직선거법 위반 관련 핵심 파일 문제를 짚어보자. 원 전 원장이 국내 정치에 관여했다며 검찰이 제시한 증거는 ‘425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이다.
이 파일들은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 김 아무개 씨의 이메일 계정에서 첨부파일 형태로 발견됐다. 지논 파일에는 광우병 FTA, 제주해군기지, 북한 미사일 발사 등 정치 이슈에 대한 원 전 원장의 논지가 요약돼 있었다. 윤석열 지검장 산하 검찰 수사팀은 이 파일들을 근거로 원 전 원장이 공직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2년차 때 이뤄진 1심 재판에서 재판부(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는 파일들의 증거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지논 파일, 시큐리티 파일의 작성자로 지목된 김 씨가 자신의 이메일 계정에서 이 파일이 발견됐음에도 “로그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작성을 부인했기 때문.
1심은 “김 씨가 작성한 것은 아닌지 강한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본인이 인정하지 않으면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법리를 충실하게 적용해 두 파일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를 근거로 공직선거법은 무죄를 선고했다. 대신 일부 트위터(국정원 직원 운영)와 리트윗 글들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 혐의만 유죄로 인정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원고(검찰)와 피고(원세훈 전 원장)의 재판 전략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2심(서울고법 형사6부)의 판단은 1심과 확연히 달랐다. “(해당 파일이 첨부된) 당일 이메일 로그인 사실을 김 씨가 부인하더라도, 그 앞뒤로 로그인한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해당일 역시 김 씨가 직접 로그인 한 것으로 봐야 한다”며 증거로 채택했다.
특히 2심 재판부는 이 같은 판단을 토대로 “트윗, 리트윗된 글을 분석한 결과 선거운동의 목적이 확인됐다”며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까지 유죄로 보고 원 전 원장에 대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한 뒤 법정구속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과정(대선)에서 국정원의 개입 여부에 대해 엇갈린 1심, 2심 판단을 건네받은 대법원은 1심이 옳다고 판단했다.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의 증거능력을 받아들일 수 없으므로 사실관계를 다시 판단하라고 파기환송 한 것.
지난 주, 검찰이 파기환송심 선고 직전 국정원의 ‘SNS 장악 보고서’와 ‘민간 댓글부대’ 운영 정황을 포착, 추가 증거를 제출하면서 변론이 재개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재판부는 예정대로 선고를 진행하겠다고 선을 그었고 오늘 ‘증거는 불인정, 유죄는 인정’이라는 변칙적인 결과를 내놨다.
법원 안팎에서는 재판 결과를 놓고 ‘정치 지형도 변화에 영향을 받은 판단’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의 고등 부장판사는 “1심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 박근혜 정부의 정당성을 흔들지 않았다면 2심 재판부의 판단은 국정원이 특정 후보(박근혜)를 도왔다고 보며 정부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는 해석의 여지가 있었다”며 “정치적 상황이 바뀌었지만 법원은 법리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에 대법원의 판단(파기환송)을 존중하되 지금 여론 흐름에서 비판받지 않을 만한 결론을 내린 셈”이라고 설명했다.
검찰 출신 변호사 역시 “굉장히 핵심 증거임에도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 변칙적인 수를 썼다는 느낌이 강하다”며 “국정원과 관련된 외곽단체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이 수사 방향과 강도를 재조정할 수 있는 결과”라고 말했다.
검찰 내에서도 ‘원 전 원장을 비롯, 국정원에 대한 수사가 더 힘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지배적이다. 검찰 관계자는 “윤석열 지검장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앉은 이상 국정원에 대한 재수사는 불가피했다”며 “증거 채택에 더 신중해 한다는 것뿐 아니라 법원이 정치적인 상황에 약하는 게 다시 확인됐다. 수사 과정에서 윗선을 어디까지 올라갈 지도 불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 벌어지는 수사는 앞선 정부들의 정통성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수사가 중단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수사와 재판에서 보인 일련의 과정이 ‘앞선 정부 때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 섞인 반응도 적지 않다. 부장검사급 검찰 관계자는 “이번 정부에서는 앞선 정부보다 구체적인 지시가 적어서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는 얘기도 나오는 게 사실이지만, 그동안 어떻게 정치, 언론에 해석될지를 고민했던 검찰, 법원이 앞선 정부 때와 똑같은 패턴을 밟는 느낌이 있다”며 “사실관계와 법리를 우선하지 않고, 주변 상황(정치)을 고려하는 기존 관습을 유지한다면 사법 개혁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민준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