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먹고 삽니까?”
노동이 불가능해 보이는 그의 수입원이 궁금해서 물었다.
“정부에서 주는 노령연금과 생활지원비 합한 돈 35만원으로 살고 있어요.”
“그 돈의 지출내역은 어떻습니까?”
“그중 10만원은 교회에 감사헌금으로 내고 나머지 돈중 23만원은 담배 값으로 써요.”
“그러면 남은 돈 2만원으로 한 달을 사신다는 얘긴데 정말 살기 힘드시겠네?”
“살기 힘드니까 월북했다가 다시 넘어왔지요.”
그의 눈에 비친 북한이 궁금해서 물었다.
“북한에 갔으면 거기서 잘 살지 그랬어요? 아파트도 주고 일자리도 주고 환영하지 않던가요?”
“두만강을 건너 넘어갔는데 처음에는 잘해 줬어요. 회령 초대소의 넓은 방을 주고 반찬도 좋았어요. 소고기, 닭고기, 개고기까지 있었어요. 매일 술도 나오고 담배도 줬어요. 신나는 건 사람들이 나보고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거였어요. 인간대접을 해주더라구요.”
“회령이 어떤 모습이던가요?”
“초대소 창 밖으로 황막한 회색들판이 보였어요. 그 가운데로 철도가 놓여있는데 며칠에 한 번씩 스무냥의 화물차를 단 기차가 기적을 울리면서 힘겹게 지나 가는게 보였죠. 더러 시내구경을 갔는데 이삼층 건물이 띄엄띄엄 서 있어요. 남한의 육십년대 풍경 비슷하다고 할까. 그런데 회령이 김일성의 부인 김정숙의 고향이라 공장을 세우고 아파트와 식당들도 만들어 북한의 번성하는 십대도시중 하나로 만들려고 계획한다고 했어요.”
“거기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어요?”
“우리 육십년대 옛날 생각하면 거의 비슷할 걸요. 머리는 잘 감지 않아서 까치집이고 옷소매들이 때에 절어서 반들거리고 그래요. 당의 고위간부라는 친구들도 사는 게 딱하더라구요. 자전거를 타고 가서 몰래 밀주를 사다가 먹곤 하는걸 봤어요. 거기도 사람이 사는 데라 좋은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습디다. 꽉 막힌 친구도 있구 말이죠. 저랑 심하게 싸운 여자도 있어요.”
“싸우다니요?”
“내가 정치적인 선전의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점점 대우가 나빠지더라구요. 반찬 가지 수도 줄고 술과 담배의 양도 확 줄여 버리더라구요. 태도도 어떻게 냉냉해 지는지 몰라요. 한번은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여성안내원에게 ‘쌍년’이라고 욕을 했는데 그 ‘쌍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상하게 이성을 잃으면서 길길이 날뛰더라구요. 나보고 뭐냐고 하느냐면 그래 이놈아 조선인민공화국은 머슴과 쌍년들이 세운 나라다 어쩔래? 하고 거품을 물고 덤비는 겁니다. 머슴과 종년들이 인민위원회를 구성해서 세운 나라라는 거예요. 그들은 상것이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반발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지금은 이렇게 퇴락했어도 양반집 자손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나보고 양반자손이면 남조선으로 도로 내려가래요. 그리고는 얼마 있다가 판문점으로 데려가더니 거기서 나를 다시 남쪽으로 쫓아 버리더라구요. 그래서 다시 넘어왔죠. 그날 구치소로 갔는데 판사가 나 같은 놈은 징역 살리기도 귀찮은지 집행유예로 그냥 풀어 주더라구요. 나 같은 놈은 남이나 북이나 어디서나 천덕꾸러기죠.”
북한은 머슴과 종들이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세운 나라라는 말이 귀에 박혔다. 그들은 남한을 친일파와 지주, 모리배가 만든 나라라고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역사의 상처를 지금도 가슴속에 끌어안고 과거의 시간 속에서 표류하는 것 같다. 남한의 가난을 이기지 못해 북으로 넘어간 노숙자는 양반계급도 반동도 아니었다. 그냥 불쌍한 한 인간일 뿐이었다. 이념의 스크린으로 상대방을 보면 전혀 다른 괴물이 보일 수 있다. 그냥 인간자체를 봐야 하지 않을까. 조금 잘 산다고 교만의 잣대로 남을 보면 ‘인간상실’이 된다. 좌우 보수진보 남과 북이 아닌 인간주의로 세상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