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열흘사이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콜레라로 죽었다. 어린 누이동생과 나만 남았다. 이웃사람들은 집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전염병이 옮을까봐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살아야 했다. 밥을 지어 동생을 먹여야했다. 땔 나무가 필요했다. 낫을 들고 나섰다. 아직 싸늘한 바람이 부는 사월이었다. 누렇게 시든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불이 붙을 풀들을 베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마른 풀을 베다가 낫이 나무뿌리를 건드리고 미끄러지면서 왼손 무명지를 치고 지나갔다. 순간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갑자기 설움이 복받쳐 올라 낫을 팽개치고 털썩 주저앉아 “어머니”하며 엉엉 울었다. 서러웠다. 피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한참 후 나는 눈물을 닦고 풀단을 메고 언덕을 내려갔다. 집에서는 누이동생이 문밖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물을 길어오고 메고 온 마른 풀과 나뭇가지로 부엌에서 밥을 지어 부뚜막에서 동생과 밥을 먹었다.’
흙 수저 출신이 시작부터 파란만장했다. 소년은 어린 동생을 아는 친척에게 강제로 주고 동학군 접장 집에 들어가 전령노릇을 하며 밥을 얻어먹었다. 어린아이면 경찰에서 의심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지능은 금수저인 것 같았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의 중학교에 진학했다. 방학 때 귀국하면 당장 입에 들어갈 밥이 없었다.
이빨이 다 빠진 할아버지가 삶은 보리를 물에 말아 억센 열무김치를 반찬으로 먹고 있었다. 일본어를 배운 그는 헌병대 사무실에 나가 아르바이트로 공문서를 써주고 몇 푼의 돈을 받는 모습이었다. 그가 사는 세상은 춥고 힘이 들었다. 당시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진 결핵에 걸려 피를 토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쓰기도 하고 상해임시정부에서 가서 활동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느닷없이 귀국하고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됐다.
그는 ‘민족개조론’이란 글을 써서 조선민족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일합병이 되고 한세대가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아득한 조선의 왕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없었다. 초라한 임시정부는 그 안에서 자체적으로 분열되어 노선투쟁을 하고 있었다. 일본은 점점 강해져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 경제대국 반열로 가고 있었다. 그의 생각이 달라졌다. 이렇게 된 바에야 현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여 낙후된 3등국 조선에서 벗어나 합병된 일본의 일등시민이 되자고 했다. 사람들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에게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은 후 침을 뱉고 돌을 던졌다.
그는 영원한 민족반역자가 되고 말았다. 해방이 되고 그는 세상에 대해 “나 자신이 악취 나는 추물인 것을 잘 압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친일반민족위원회에 체포되어 갔다. 그가 죽고 난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의 딸도 할머니가 된 것 같다. 노무현대통령시절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활동을 할 당시 미국의 이광수 후손이 인편을 통해 소송의사를 내게 전했다가 철회했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대해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주의자들이 더러 오해받고 회색분자로 매도되는 경우도 있다.
정치학교수들의 대부인 김상협 고려대 총장 은 해방 무렵 세계정세는 미소의 냉전체제에서 세계 어느나라던지 미국 아니면 소련 둘 중의 하나 쪽으로 줄을 서야 하는 현실이었다고 했다. 김구선생이 주자하듯 남북이 한민족으로 통일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이지 현실은 아니라고 했다. 영리한 이승만대통령은 미국 쪽으로 줄을 서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고 했다. 김상협교수가 총리가 되고 나중에 체코의 티토대통령을 만났을 때 유고슬라비아대통령은 너희는 애초에 줄을 잘 섰다고 부러워하더라고 했다. 이제는 이념의 잣대로 현실을 보지 말고 현실을 통해 이념을 형성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