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으로 몰려든 한가위 선물 택배.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지난해까지만 해도 기업은 해마다 두 번 명절 선물 준비에 여념 없었다. 선물 받을 사람의 중요도를 표로 만들어 등급별로 선물 가격을 정한 뒤 직원들 시켜 손편지까지 준비시켰다. 비용은 비용대로 들어가고 직원들은 ‘업무 외 업무’에 신경 쓰느라 연휴를 앞두고 늘 정신 없는 시기를 보냈다. 특히 국회나 위원회 등 대관 업무를 담당한 직원들은 명절에 앞서 ‘명절 증후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은 기업의 수고는 올해부터 찾아 보기 힘든 풍경이 됐다. 한 통신사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최대 150만 원까지 등급 별로 선물을 보냈다. 하지만 지난 설부터 이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 해마다 설과 한가위 선물 준비에 진땀을 흘렸던 직원들은 이를 반기는 분위기다. 한 직원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선물 준비하랴 편지 쓰랴 명절이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며 “김영란법 이후 선물 문화를 완전히 없애 버려서 명절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선물 보내는 문화를 없애지 못한 기업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전체 비용은 예전에 비해 큰 폭으로 줄었다. 삼성그룹은 대관 업무를 하는 팀조차 선물 액수를 5만 원 이하로 정했다. 내부 직원끼리의 선물도 5만 원 안에서 해결하는 문화가 퍼지고 있다. 한 삼성전자 직원은 “이런 분위기는 내부 문화로 정착됐다. 친한 동료끼리 진급 선물할 때도 5만 원 아래로 하는 게 일상이 됐다”고 했다.
김영란법의 정착을 반기는 건 기업 내부뿐만 아니었다. 김영란법의 일상화에 시장이 바로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선물을 해도 되나”하는 불안 심리가 한가위 선물 시장을 위축시켰다. 법이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적용 기준 등이 애매모호했다. 김영란법 기준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자 업체들은 소비자 맞춤형 한가위 선물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다. 소비자 지갑은 예전처럼 열렸다.
소비자의 선물 구입 경향은 뚜렷한 양극화로 이어졌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사람에게 줄 고가 선물 매출이 크게 확대됐다. 롯데백화점은 상품군 별로 프리미엄 선물세트를 선보였는데 100만 원을 넘는 한우와 굴비 등이 순조롭게 완판을 향해 가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50만 원 이상 한우와 30만 원 이상 굴비 등 매출이 평소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 신세계백화점 역시 지난해에 비해 매출 신장 폭이 컸다. 특히 한우를 포함 20만 원이 넘는 선물 세트가 많이 팔렸다.
중저가 선물 판매량도 고가 선물과 함께 한가위 선물 매출을 이끌었다. 주요 화장품 기업은 김영란법에 맞춰 2만 9500원 선물 세트를 한가위 기획으로 마련했다. 시장 반응은 평소보다 훨씬 낫다는 분석이다. LG생활건강 관계자는 “한가위에 앞서 선물 구성 세트를 중저가 시장에 맞춰 2만 9500원으로 내놨다. 현재까지 판매도 지난해에 비해 준수하다. 지난해에 비해 명확해진 가격대에 시장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가와 중저가 한가위 선물 세트 판매가 쌍끌이를 하는 가운데 유통업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20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가위 선물 세트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한 3대 백화점 롯데·신세계·현대의 매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평균 94.3% 증가했다. 두 배 가까운 증가세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김영란법에 저촉될까봐 전전긍긍하던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다”며 “각자 법을 이해한 뒤 선물 구매 비용을 알아서 정해 예전과 같은 정상적인 한가위 매출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유통업계를 포함 주요 기업이 김영란법에 적응하며 나름의 묘안을 내는 반면 한가위를 앞두고 농축산업계와 요식업계 등은 계속해서 불만 섞인 목소리를 내왔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김영란법 시행 뒤 첫 명절이었던 지난 설 때 국내산 농축산물 선물세트 판매액은 시행 전보다 25.8% 감소했다.
요식업계도 타격을 입었다는 주장이 대두됐다. 음식점과 주점 등 요식업계 종사자수가 약 3.1%인 3만 382명 감소한 데 따른 주장이다. 하지만 최저임금 상승을 대비한 영향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농축산업계의 매출 부진 역시 이번 한가위를 중심으로 예전 수준에 도달할 거라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자연스레 국회에서도 김영란법 선물 금액과 음식물 제공액 상한선 상향을 논의했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19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김영란법 관련 선물과 음식물 제공 상한선을 10만 원으로 높이는 등의 안을 심사했다. 하지만 현재 수준을 유지하자는 국민 여론이 대세라는 주장이 잇따르며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국회 관계자는 “안 그래도 국민권익위원회가 의뢰한 김영란법 실태조사가 한창이다.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일부 여론에 휘둘려 법을 개정하는 건 김영란법의 본래 취지에 비춰 옳지 않다”며 “지금의 수준을 유지하자는 여론이 더 높은 게 사실이다. 정무위원회는 국민권익위원회 조사가 완료되는 오는 11월쯤 김영란법 개정 여부를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최훈민 기자 jipcha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