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백리를 달려온 섬진강이 바다와 맞닿는 하동포구는 벌써 봄풍경이 그윽하다. 3월부터는 산수유 매화 벚꽃이 화사 하게 강마을을 뒤덮는다. | ||
멀리 진안에서부터 임실 곡성 하동을 거쳐 결국에는 광양만으로 흘러드는, 팔공산의 작은 웅덩이에서 출발하던 그 실낱같은 희망이 바다가 되는 과정은 거슬러 올라오는 봄의 여로와 닮아있었다.
입춘도 우수도 지나고 나니 봄이 오는 길목에 마중이라도 가고 싶다. 금모래빛으로 반짝이는 섬진강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는데, 문득 섬진강은 어디서부터 어디로 흘러가는 길이어야 할지 대답할 길이 막막하다.
섬진강은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강이면서 맑고 깨끗하기로는 제일이다.
섬진강의 시인 김용택이 어디에 사는지도 궁금하고 부드러운 모래와 시원한 재첩국도 기억해낸다. 섬진강은 압록, 구례 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하동포구 80리 길을, 그 길만을 줄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강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그 강을 이루기까지는 실낱같은 물줄기들이 저 멀리 전라북도의 끝에서부터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며 하동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섬진강의 원류를 찾겠다는 포부는 매끈한 국도와 먼지 폴폴 날리는 지방도 사이의 잦은 이사로부터 시작된다. 발원지라고 알려진 곳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 마을. 마을 위쪽 팔공산(1,080m) 중턱에 있는 데미샘에는(도보로 약 30분이 걸린다) ‘섬진강 발원지’라는 돌비석이 크게 세워져 있고 그 옆 작은 샘에서 물이 쫄쫄 흘러나온다.
▲ 국사봉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옥정호. 이 호수는 섬진강댐 이 건설되면서 생겼는데 물가운데 섬이 인상적이다. 아래 는 구례군 토지면에 위치한 조선시대 고택 운조루. | ||
발원지인 진안을 나와 임실군 관촌면으로 흘러든 강물은 사선대 유원지에 당도한다. 특별히 볼 것은 없다는 관리인의 솔직한 답변이 이날 따라 섭섭하다. 그래도 섬진강이 만들어낸 최초의 풍광이거늘.
운암면과 강진면을 통과한 후 섬진강댐으로 막힌 강물은 옥정호(운암호, 갈담저수지)를 만들어 낸다. 호수를 끼고 산길을 따라 이어지는 옥정호는 섬진강 개발에 따라 드라이브 명소로 조성되고 있다. 국사봉 전망대에서 보면 옥정호와 호수 속의 섬이 멋지다.
강 마을은 덕치면에 이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덕치면 장산리에서 순창군 동계면까지 이어지는 30여 리 계곡과 산골마을이 강을 따라 이어진다. 작고 초라한 마을들이 이름도 없는 산들에 둘러싸여 그저 강을 마주하며 서 있는 모습은 어찌보면 서럽고 한편으론 원시처럼 소박하여 반갑다.
섬진강변에 사는 시인 김용택이 자라고 뿌리를 내린 덕치면 장산리(진메마을)에는 시인이 심었다는 큰 느티나무와 마을 사람이 심었다는 또 한 그루의 큰 나무가 마을회관을 호위하는 태세다. 시인은 학교에 가고 없는데 그의 외삼촌이라는 분이 말을 건넨다.
“서울서 뭣땀시 여까정 왔소? 쩌~~ 집이 우리 조카 집이구만.”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산골마을에서 이웃들의 진솔한 삶을 시나 글로 담아내는 일, 한 마을의 생성과 쇠락, 그 슬픈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생애의 과업으로 삼는다는 섬진강 시인. 그를 만나보려는 욕심도 잠시. 무턱대고 찾아와 만나는 것도 딴은 곤혹스러울 것 같아 느티나무만 한바퀴 돌다 강으로 내려선다. 강을 건너는 유일한 수단이었던 징검다리 위로 아낙네의 순한 걸음도 아이들의 장난기 섞인 물장구도 당장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세상의 끝처럼 느껴지는 이곳에서 강줄기를 따라 돌면 이제는 노인 몇 분만 남아 있는 천담마을, 구담마을로 이어진다. 강은 멀어졌다가 다시 섬진강 중류인 순창으로 이어진다.
=>상류: 진안(30번국도)-49번(관촌면 사선대)-27번국도 운암방면(옥정호)-717번 덕치면 동계면(진메, 천담마을)/ 27번을 따라 순창방면에서도 진입가능-순창에서 곡성까지는 730번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제대로 강을 구경할 수 있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맑은 강인 섬진강은 아름다운 길 하동포구 80리 를 품고 있다. 사진은 하류의 갈대밭. | ||
곡성에 들어서면 그저 17번 국도를 따라 구례구역까지 내려가는 일이 전부다. 왼쪽에 강을 두고 함께 흐르는데 가정리의 살골나루터며, 두가교를 지나기도 한다. 지금은 폐쇄된 두가교 대신 튼튼하고 멋없는 교량을 건설중이고, 가정교를 지나도 예전처럼 살가운 나루터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다. 아주 오래된 철도역의 하나인 압록역(1936년 12월)과 함께 관광단지로 개발중인 주변은 멋과 자연스러움을 잃어 가고 있다.
압록면에서 다시 보성강과 만나고 구례구역을 지나면서 동쪽 지리산 피아골에서 흘러나온 귀한 물줄기를 더하니 강은 깊어진다. 하동에 도착하기 전 19번 국도에서 운조루라는 조선시대 고택을 지나가게 되는데 영화 <청춘>의 촬영장소로 알려있다. 전통가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들를 만한 장소이다.
하동에 진입하면 강물이 오른쪽으로 흐르고 하동을 이름나게 하는 다원들과 배꽃 나무들이 왼쪽으로 흘러간다. 정답고 넉넉한 길이다. ‘있을 것은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다’던 화개장터는 바로 쌍계사 입구에 있다. 곱게 단장을 해놓는 바람에 장터의 옛 자취는 사라지고 아쉬움만 남는다. 장터 앞 화개나루 역시 오랫동안 전라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던 중요한 교통수단이었으나 그 옆으로 커다란 교량이 건설되는 중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물 건네줄 줄배의 사공은 나타나지 않는다. 쌍계사로 들어가는 입구는 ‘십리 벚꽃길’로도 유명하지만 꽃이 만개하는 4월이면 차와 인파에 밀려 몸살을 앓기도 한다. 화사한 벚꽃은 제대로 마주하기가 그만큼 어렵다.
하동포구 80리 길을 지나가다 악양면 평사리공원에서 길을 멈춰서보자. 화개나루 다음으로 넓은 강폭을 자랑하지만 이곳은 부드럽고 고운 모래사장으로 사랑을 받는 곳이다. 전형적인 섬진강의 봄 풍경이 펼쳐진다. 걸어 들어가 고운 모래도 만져보고 바닥까지 투명한 강물에 두 손도 적셔본다. 평사리를 지나갈 때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됐던 최참판댁을 들러도 좋다.
이제 섬진강은 2백50년 묵은 하동송림을 지나 마침내 바다가 되려는 숙원을 목전에 두게 된다. 송림 건너편은 광양이다. 고향산천(세 개의 도와 열두 개의 군을 거쳐)을 제 살처럼 파고들면서 아프고 깨지던 그 섬진강이 용케도 5백 리를 달려와 준 것이다. 섬진강의 마지막 여정은 하동군과 광양시 경계에서 남해로 흘러든다.
섬진강은 쾌활한 이웃처럼 흘러 대지를 적시고, 오늘도 바다를 꿈꾸며 봄 마중을 나간다.
=> 중·하류: 곡성에서는 17번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압록역, 구례구역을 지나 18번국도를 만나 구례로 진입하면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국도를 만난다. / 하동포구 80리 길을 지나 섬진교(하동송림 건너편)를 건너면 광양만이다. 다리건너 오른편 861도로를 따라가면 섬진강 유래비가 있는 다압면 섬진마을로 갈 수 있다.
박수운 여행전문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