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밀꽃이 소금을 뿌린 듯 필 때면 강원도 봉평에선 매년 효석문화제가 열린다. | ||
효석문화제(9월10∼19일)가 열리는 봉평으로의 문학기행, 소설 속처럼 하얀 메밀꽃이 흐드러진 이야기 속으로의 여행은 덤덤한 여타의 문학기행과는 달리 재미까지 덤으로 선사한다.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고장 봉평면 창동리 효석문화마을. 소설의 주무대였던 봉평장터와 물레방앗간 등을 둘러보노라면 장돌뱅이 허생원이 금세라도 나타나 애틋한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허생원이 나귀에 물건을 싣고 나가 팔았던 봉평장은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일과 7일마다 장이 열리는데 장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 재래장 특유의 풍경과 구수한 인심이 남아 있다.
장터 옆에 가산공원이 있다. 가산은 이효석의 호. 이효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3년 준공됐다. 1천평쯤 될까. 아담한 이곳에는 문학비와 동상 등이 서있는 조형광장과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다. 공원 한가운데 높이 솟은 돌배나무가 눈에 띈다. 굵은 밤톨만한 돌배는 직접 먹지는 못하고 술을 담그면 좋다. 바람이 한 차례 불자 후드득 돌배가 떨어진다. 어린아이들이 앞다퉈 돌배를 줍는다. 그들만의 즐거운 놀이는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 (위)이효석 생가,(아래)1930년대 봉평을 야생화로 축소해 놓은 ‘야생화로 쓴 메밀꽃 필 무렵’ | ||
허생원의 표현을 빌자면 성서방네 처녀와 지샌 ‘무섭고도 기막힌 밤’의 공간적 배경이 된 물레방앗간.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레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 그러나 처녀란 울 때 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이곳에서 벌어졌을 야릇한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흘끗 물레방앗간 내부를 엿보고는 머쓱해 한다. 기대와 달리 내부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물레방앗간을 오른쪽으로 돌아 1km쯤 올라가면 이효석 생가다. 길이 조금 멀다고 자동차를 이용해 후딱 다녀온다면 편하기야 하겠지만 메밀꽃이 가득 핀 시골길의 정취를 놓치고 만다. 길가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메밀꽃밭. ‘산허리는 온통 메밀꽃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하다’는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바쁠 것 없는 걸음, 천천히 걷다보면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마저 든다.
이효석 생가는 본래 초가지붕이었으나 기와지붕으로 고쳐 복원해 놓았다. 싸리울이 쳐진 생가는 그러나 그 옆 음식점에 비해 초라하고 방치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깝다.
기념 장소를 찾는 사람들은 추억을 남기고 싶은 법. 생가 앞 메밀밭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한 농부의 일년 농사이니 들어가지 마세요’라는 팻말이 있지만 아랑곳없다. 그 농부의 자식인 듯 예닐곱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연신 “들어가지 마세요”를 외친다. 목소리엔 어찌할 도리 없는 체념과 원망이 묻어 있었다. 어디 이곳만의 일이겠는가. 질서의식이 아쉽다.
이효석 문학관은 물레방앗간과 생가 중간쯤에 있다. 이곳에는 그의 생애와 문학세계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볼 수 있도록 초간본 책, 작품이 발표된 잡지와 신문 등을 전시해 놓았다. 문학교실에서는 다양한 영상물을 시청할 수 있고, 학예연구실은 이효석과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해 그의 문학세계를 연구하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문학관으로 뿐만 아니라 주변 조망 장소로도 손색없다. 주변부보다 해발 100m쯤 더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봉평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야생화로 쓴 메밀꽃 필 무렵’이란 곳도 들러볼 만하다. 미니어처 파크라고 해야 할까. 겨우 1백여 평 공간에 1930년대 봉평 일대를 야생화로 축소 재연해 놓은 곳. 장터와 물레방앗간, 산과 계곡 등을 아기자기 하면서도 세밀하게 표현했다.
▲ 흥정천에는 소나무 기둥을 박아 그 위에 가지를 얽고 황토를 덮어 만든 길이 40m 폭 2m의 섶다리가 놓여 있다. | ||
문화제 기간에는 언제나 봉평장터 옆으로 2천평 규모의 먹거리 장터가 선다. 이곳저곳 둘러보다 시들해지면 이곳에 가서 메밀부침 한저름에 동동주 한잔하면서 일행과 이야기 보따리를 푸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제기차기 널뛰기 등 민속놀이와 전통 찹쌀떡치기 등도 펼쳐진다. 장터 한쪽에서는 재래 닭싸움이 열려 재래장터의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메밀국수, 메밀묵 등 전통음식 만들기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된다.
문화제가 시작되는 첫날 문예 백일장이 열리고 퀴즈대회와 사물놀이도 펼쳐진다. 둘째 날 오후에는 가장행렬, 밤에는 메밀꽃밭을 배경으로 문학의 밤이 열린다. 올해는 이 무렵이 그믐이어서 달빛이 없을 것이 아쉽다.
이외에도 거리콘서트(13일), 공중줄타기 공연(18일) 등이 펼쳐진다.
연극도 볼 수 있다. 효석문화제에 맞춰 연극인 유인촌씨가 설립한 덕거연극인촌이 개관, 폐교 덕거초등학교에서 개관 공연을 갖는 것. 메밀꽃 가득한 산골 폐교의 연극 관람은 색다른 경험으로 다가올 듯하다.
‘달빛극장’이라고 부르는 야외무대에서 젊은 연출가와 배우들이 선보이는 <리어>를, ‘바람카페’로 변신한 실내 스튜디오에서 가수 유열, 연극배우 박정자 등 대중예술가들이 함께하는 ‘책 읽어주는 카페’가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