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씨 방 한 켠에 소중하게 위치한 아들 다운 군의 물건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 11일 오후, 기자는 이 씨가 살고 있는 안산의 한 빌라를 찾았다. 4년 전 장례식장에서 만났을 때처럼 수척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이 씨 얼굴에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아들 얘기가 나올 때마다 이 씨의 표정은 생생해졌다. 어제까지 함께 있었던 것처럼 故 다운 군과의 추억을 구체적으로 회상했다. 이 씨의 방 안에서도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故 이 군의 사진은 물론, 이 군이 공부하던 교과서와 이 군이 즐겨 치던 기타도 방 한 쪽에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원래 단원고 근처에 거주하다가, 사고 후 집을 옮겼다는 이 씨. “단원고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는 고등학생들을 볼 때마다 아들이 생각나서 너무 힘들어 어쩔 수 없이 이사했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조용한 동네인 것도 좋지만, 학생들이 안 보여서 조금 더 편하다고 덧붙였다. 방 안에 남은 故 다운 군의 유품들에 대해 묻자, “이사를 하면서 아들의 짐을 많이 정리했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것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들이 예전에 쓰던 휴대폰 역시 옛날 사진을 볼 때마다, 이 씨가 자주 찾는 아들의 유품이라고 했다.
오랜 만에 만난 이 씨에게 “그 동안 어떻게 지내셨느냐”고 안부를 묻자, 이 씨는 대뜸 아들이 최근 꿈에 나왔다는 얘기를 꺼냈다. 갑자기 3일 연속 꿈에 나왔다는 것. “지난해 말, 갑자기 안 나타나던 녀석이 3일 연속으로 꿈에 나타나 놀랐다”며 운을 띄운 이 씨는 꿈 속에서 아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며 말을 이어갔다.
하루 꿈에 나와 표정이 안 좋길래 그러려니 했는데, 몇 달 만에 꿈에 나온 데다 3일 연속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느낀 이 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월호 유류품을 확인할 수 있는 목포시 인터넷 홈페이지를 찾았다. 그리고 아들의 가방이 찍힌 유류품 사진을 찾아냈다. 아들의 가방이 인양된 세월호 안에서 발견된 것.
“수학여행 가기 전에 사 준 게 세 가지 였거든요. 지갑하고 신발하고 가방. 여행 전날 직접 다 짐을 챙겨줘서 색깔하고 모양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진 속 가방이 딱 맞더라구요. 사진을 자세히 봤더니 가방에 달린 명찰에 이다운 이름 가운데 ’이다‘ 까지만 써있길래 자세히 봐달라고 전화로 문의 했더니 아들 이름이 맞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인양된 세월호 안에서 발견된 故 다운 군의 가방. 사진 제공 = 이기홍 씨
눈이 유난히도 많이 내리는 날, 이 씨는 故 다운 군의 동생 다슬 양과 함께 목포에 내려갔다. 그리고 지난 4년여의 시간 동안 바닷 속에서 다 헤져버린, 내용물이 대부분 유실된 아들 다운 군의 가방 유품을 찾았다. 그리고 곧바로 자주 찾던 안산의 한 사찰로 향했다. 거기서 아들의 유품을 또 한 번 태워 보냈다. 이 씨는 아들 영정까지, 지금껏 사찰에서 유품 등을 태운 횟수가 4번이나 된다며 씁쓸히 웃었다.
故 이다운 군은 다른 희생자들에 비해 많이 알려진 편이다. 평소 아버지 이 씨, 동생 다슬 양과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즐겼던 故 이다운 군. 그가 작사작곡한 노래가 포맨 신용재 씨를 통해 ‘사랑하는 그대여’라는 곡으로 완성돼 음원 차트 상위권에도 올라갔었다. 이 군에게 기타를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 이 씨인데, 이 씨는 당시 본인이 운영했던 인터넷 방송에서 직접 노래를 하곤 했다. 이를 지켜본 아들 이 군도 아버지를 따라하곤 했다. “내가 방송해도 되냐”며 기타를 배워 여러 차례 인터넷 방송에서 노래를 하기도 한 것. 이 씨는 그런 이 군의 재능이 이렇게 세상에 노래로 남게 되서 행복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지난해 사고 3주기를 기점으로, 탈상을 해, 이제는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 씨. 그럼에도 가방 얘기가 나오자 ”아직 기다리는 게 있다“고 답했다. 새로 사서 신겨 보낸 신발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이 씨는 “수학여행 전날 새로 사서 준 것들 중 가방은 이번에 찾았고, 지갑은 첫날 시신과 함께 나왔는데 아직 신발이 나오지 않았다”며 ”신발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아들이 신고간 신발 사진을 얼마 전 바꾼 휴대폰에도 소중히 넣어둔 이 씨는 사진을 보여주며, 사고 전날을 짐을 싸던 순간을 생생히 회상했다.
밤 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에서 이 씨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다고 다운이가 살아 돌아오냐,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지난 일들을 얘기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인 듯 느껴졌다. 이 씨의 마음 속 시계는 아들 신발이 찾아질 때까지,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도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당일에 멈춰져 있을 듯 하다.
서환한 기자 brigh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