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여파가 휩쓸고 간 지 1년 가까이 지났지만, 예술계 내홍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사진=서울시 제공
사건의 발단은 최근 SNS 상에서 돈 사설정보지(지라시)였다. 연극계 유서 깊은 단체인 한국연극협회가 국가보조금인 문예진흥기금을 사용하고 사용처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제보자의 말을 빌어 보조금 사용 용처를 묻자 한국연극협회장이 회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것.
연극계 가장 큰 조직 중 하나인 한국연극협회는 국내 대표적 행사인 전국연극제·젊은연극제·청소년연극제·늘푸른연극제 등을 주최하고 있다. 한국연극협회 밑에 광역시도별로 16개의 전국 협회 지부가 있다. 보조금 미정산 문제가 불거지면서 탄핵위기에 내몰린 정대경 한국연극협회 이사장은 22일 자진사퇴를 결정했다.
문예진흥기금을 집행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와 한국연극협회의 입장을 종합해보면 앞의 사설정보지는 사실과 다르다. 한국연극협회는 2016-2017년 집행된 기금에 대한 정산자료를 이미 문예위에 제출했고, 정산자료에 대한 최종검토가 이뤄지는 중이다. 공연의 경우 성수기가 2~3월이기 때문에 연말에 일괄적으로 정산을 하지 않고 말미를 주고 있다. 실제로 1~2년 가까이 정산이 미뤄지는 경우가 제법 있다는 것이 문예위의 설명이다.
문예위 관계자는 “연극협회에 10차례 이상 정산하라고 공문을 보냈지만 미정산 때문에 지원금을 끊을 수는 없었다. 무대, 작가, 배우 등 페이를 지급 받아야 할 예술인들이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다만 올해 같은 경우는 보조금법에 따라 6억 원 정도 지급되어야 할 보조금이 중단됐다”고 말했다.
한국연극협회 관계자는 “정산을 담당하는 직원 한 명이 매년 영수증을 모두 첨부해 정산을 해야 한다. 일이 몰리는 데다 국가보조금 정산 시스템이 바뀌어 이를 숙지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며 “이사장은 세세한 정산 내역을 알지도 못하는데 마치 개인적으로 지원금을 착복한 것처럼 소문이 났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수십억 원에 가까운 돈을 정산하는 과정에서 지연이 있었다는 것.
이렇다보니 사설정보지에 담긴 내용이 일부 사실과 다르고 협회장을 흔들어 내쫓으려는 악의적 의도가 담겼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국연극협회 이사회는 정대경 이사장의 탄핵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고 알려졌다. 한국연극협회 이사진은 35명으로 지역별 지부장 16인과 프로듀서협회, 연출가협회, 극작가협회 등 단체장들로 구성돼 있다. 한국연극협회는 이사진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사장도 사퇴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고 있다. 앞서 7월 ‘블랙리스트 타파와 공공성 확립을 위한 연극인회의(블랙타파)’는 정대경 이사장을 ‘블랙리스트 실행 방조’의 이유로 형사고발했다.
문화계 한 관계자는 “보조금 정산이 정말 지난하고 힘든 과정인 것은 맞지만 2년째 미뤄진 데 대해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합리적”이라며 “세부내역은 문예위에서 검토하겠지만 이를 감독하지 않은 정부부처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적폐청산이 한차례 이뤄졌지만 문화행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 예술계의 애로사항이다. 각종 기관 단체장은 장기 공석상태에 있다. 국립극장은 극장장 최종후보에 오른 김석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성추문 논란으로 낙마하고 1년 가까이 극장장 자리가 비어 있다.
예술경영지원센터 대표는 지난 5월 윤미경 전 국립극단 사무국장이 대표로 임명된 지 하루 만에 블랙리스트 방조 논란에 임명 철회된 뒤 대표 대리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도 이사장 인선 작업을 하고 있지만 유력 후보의 블랙리스트 방조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문제없이 인선이 이뤄진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인연이 깊은 김영준 전 다음기획 대표의 한국콘텐츠진흥원 사장 임명 정도다.
다른 어느 분야보다 문화계 기관의 수장자리는 중요하다. 문화계의 재정자립 능력이 부족해 정부차원의 예술가 지원은 지속적 예술 활동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특혜-배제 논란이 지속적으로 불거지는 것은 정해진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데 예술을 자로 재듯 평가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인 탓이 크다. 그래서 특히 기관장 성향이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불똥은 제대로 된 인선을 내지 못하는 문체부로까지 튀고 있다.
예술계는 고인 물처럼 원로들이 장악하고 있는 문화계의 폐쇄적 구조에서 적폐에 동참하거나 방조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 어려운 것을 문제로 꼽는다. 실제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를 통해 국립극장, 예술의전당, 문화예술위원회, 문화체육관광부까지 블랙리스트 방조에서 자유로운 기관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원로 위주의 문화계에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연극협회 한 관계자는 “원로 예술인은 물론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은 예술인 누구를 데려와도 각종 논란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라며 “예술인 스스로도 자성과 혁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금재은 기자 silo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