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묵 깨고 소환 응했는데 정작 ‘압수수색’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고, 물건을 해외에서 밀수입한 의혹을 받고 있던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이 변호인단을 통해 “출석해 조사받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은 지난달 중순. 그동안 “언제 나와서 조사를 받겠냐”고 추궁하던 국세청이었지만, 정작 이명희 이사장 출석 의사에 반응이 시큰둥했다고 한다.
지난 7월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소환되던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최준필 기자
이유는 새로운 수사 거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 국세청은 진에어를 상대로 특별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지난달 20일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서울 강서구 진에어 본사에 직원들을 파견해 세무조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는 예치 조사에 착수했다. 예치 조사는 검찰 수사로 비유하면, 압수수색에 해당하는데 국세청 조사관들을 현장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 필요한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교통부가 미국 국적인 조현민 전 진에어 부사장의 불법 등기이사 재직과 관련해 면허취소를 하지 않기로 결정한 지 사흘 만이었다.
국세청이 주목한 부분은 조현민 전 부사장이 지급받은 퇴직금 8억 7400만 원이 적법한지, 면세품 중개업체를 통해 얻은 부당 이득은 없는지 등이다. 대한항공은 기내 면세품을 대부분 중개업체에서 납품받았는데, 해당 면세품 중개업체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것이었다. 부인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현아·원태·현민 씨 등이 공동 대표로 있다. 국세청은 한진그룹 총수일가가 이 과정에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은 것이 있는지도 확인 중이다.
대한항공 내부 흐름에 밝은 수사당국 관계자는 “그동안 언론에서 뜸해진 뒤 시간을 벌던 대한항공 측이 다시 수사에 협조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정작 수사기관들이 그동안 모인 첩보 등을 활용해 수사를 새롭게 펼치는 상황”이라며 “이명희 이사장 역시 면세품 중개업체 수사 과정에서 확인해야 하는 부분들을 합쳐 향후 소환 시점을 조율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 경찰과 검찰이 같은 사건 놓고 겹치기도
그런가 하면, 한 사건을 놓고 서로 다른 두 수사기관이 수사에 착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경찰과 검찰 수사가 겹친 영역은 바로 한진가 경비용역비 배임 사건.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는 지난 4일,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회사 경비인력을 자택 경비로 배치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정석기업 등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경찰이 처음 혐의를 포착한 것은 지난 5월. 조 회장과 정석기업 대표 원 아무개 씨 등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입건한 뒤 수사를 벌여왔고, 내사 과정에서 조 회장 일가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 경비를 용역업체에 맡겼음에도, 정작 비용은 대한항공 계열사에서 지급하게끔 했다는 구체적인 혐의를 포착했다. 지난 4일 압수수색을 통해 경비원 급여 관련 도급비용 지급내역서, 계약서, 피의자들의 공모 여부에 대한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문제는 지난 100일 동안, 검찰 측에서 해당 의혹에 대해 대한항공을 상대로 수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남부지검에서는 이미 관련 자료와 계약서 등을 대한항공 측으로부터 제출받아 혐의를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가 서울남부지검 관할도 아니기 때문에, 두 수사기관이 동시에 수사를 벌인 것을 놓고 ‘검경 수사권 조정 후폭풍’이라는 말이 나온다. 대한항공 수사 흐름에 밝은 검찰 관계자는 “수사 시점을 놓고 보면 경찰이 먼저 내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수수색까지 3달 이상이 걸렸다, 검경 수사권 조정 논의가 한창이던 올해 중반의 흐름이 뒤늦게 한 사건을 놓고 겹치는 일로 확산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 끼인 대한항공은 죽을 맛…“영장 불가피”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수사에 가장 지친 곳은 대한항공이다. 조현민 전 부사장이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을 뿌린 사실이 SNS를 통해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4월 12일. 경찰이 조 부사장 등에 대한 출국금지 조치와 함께 본격 수사에 착수한 지 벌써 5개월이 넘었다.
그 사이 대한항공을 향한 수사는 뿌린 물(경찰)에서 외국 가정부 불법 고용(출입국당국), 조양호 회장 일가의 비자금 조성과 탈세(관세청, 검찰) 등으로 확대됐다. 검찰을 포함한 11개 정부기관이 달려들어, 조 회장 일가와 대한항공 및 계열사(진에어)의 비리까지 모두 확인하고 있다.
대한항공이 울상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 대한항공 측 관계자는 “잘못한 것은 처벌을 받아야 하지만, 이렇게 먼지 털리듯 수사를 받은 대기업이 어디 있느냐”며 “오너 일가의 잘못된 소소한 행동들이 회사 전체에 막심한 피해로 돌아오는 부분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하지만 새롭게 수사가 확장된 영역이 있어, 수사는 빨라도 올해 말은 돼야 끝날 전망이다. 앞선 검찰 관계자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수사하겠다는 것이 검찰의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안재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