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나는 이정화 과장을 붙잡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장소 운운하며 어설픈 유혹을 걸었던 따위야 오해였다고 변명이라도 하겠지만, 그녀의 이혼 이야기를 꺼냈던 것만큼은 분명 치명적인 실수였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내 몸뚱아리는 넥타이도 풀지 못한 채 아파트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머릿속이 부서질 듯 지끈거려 왔고, 발 밑에는 찌그러진 캔맥주 깡통들이 대여섯 개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격주제 휴일인 주말이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이정화 과장과 재회한 것은 그래서 이틀이 지난 월요일이었다. 사무실에서 그녀를 마주치자마자 나는 생소함부터 느꼈다. 그녀의 옷차림이 왠지 달라져 있었다. 익숙한 타이트 스커트 대신 좀처럼 입지 않던 딱딱한 스타일의 바지정장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도 아무 말이 없었다. 나 역시 주변의 눈치 탓에 선뜻 말을 걸기 힘들었다. 과연 이혼녀 직장상사가 여자로 보였던 것일까? 하루종일 그런 고민에 시달리던 나는 오후가 되어 묘한 광경 하나를 목격했다.우연히 다른 부서에 들렀다가 돌아왔을 무렵 이정화 과장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내 바로 옆 자리의 B대리와 함께 업무를 보고 있었다. B대리는 책상에 앉아 있었고 허리를 숙인 그녀는 그 곁에 서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순간 나로서는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잔뜩 뒤로 내밀어진 그녀의 둔부와 맞딱뜨려야만 했다.
그것은 꽤 민망한 장면이었다. 이정화 과장의 커다란 양쪽 엉덩이에는 한가운데마다 각각 굵은 선이 확연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마치 대문자 ‘A’를 거꾸로 그려놓은 것처럼 대각선으로 이어진 그 윤곽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다름 아닌 그녀의 팬티 라인이었다. 심지어 유심한 내 눈길은 두 줄기 선의 복판을 가로지르는 제3의 봉합선까지 발견해내고 있었다.
제길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이정화 과장은 여자였다. 풍만한 육체를 지닌 여자임에 틀림없었다.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를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상체를 세우고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은 나는 컴퓨터를 켜고 사내 이메일을 연 뒤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지난번 술자리는 사과드립니다. 주제넘은 이야기겠지만 선배님이 좋은 남자를 만나기를 바랍니다.’반 시간쯤 지나자 그녀가 접속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치채이지 않게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모니터를 응시하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굳이 내 쪽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물론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이정화 과장은 더 이상 나를 야근에 부르는 법이 없었다. 나 스스로도 일부러 사적인 접촉을 피했다.미스 박과는 당연히 끝이 났다. 이미 나의 관심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접근 #2>
이정화 과장과 내가 다시 가까워진 계기는 약간의 우연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미스 박을 정리한 뒤에도 특별히 그녀에게 접근하지는 않았다. 몇 주 동안 의도적으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 역시 여자라는 생각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은 늦여름에 벌어졌다. 어느 주중엔가 이정화 과장은 갑작스레 이틀이나 결근을 해버렸다. 워낙 드문 일인지라 사람들은 이유를 궁금해했다. 한데 그녀가 며칠 뒤 다시 출근했을 때 부서 안에서는 적잖이 수군거림이 일어야 했다. 그녀의 외모가 완전히 바뀌어진 때문이었다. 멋없던 긴 머리채가 어느새 싹둑 잘라져 있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그 커트머리에 더해 얼굴 화장마저 어쩐지 짙어져 있었다.
“허…, 그동안 몰래 이쁜이 수술이라도 받은 건 아닐까? 처녀막 재생 수술 말이야. 그렇잖아, 드디어 재혼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른다구.”흡연실에서 만난 A대리는 그렇게 지껄였다. 하지만 그녀의 직함 탓에 아무도 영문을 물을 수는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외근을 나갔다가 느지막이 회사로 돌아왔다. 퇴근시간이 한참 넘었기에 늘 그렇듯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한 나는 들어서자마자 무심코 전등부터 켰다. 화들짝 기겁을 한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과, 과장님?”뜻밖에도 그녀가 그곳에 있었다. 까딱하면 귀신이라고 착각했을 법한 그 어둠 속에 이정화 과장이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미안해. 놀랐어…?”“어…, 예.”놀라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듯했다. 불빛에 눈이 부셨는지 그녀는 나를 보더니 슬그머니 얼굴을 돌렸다. 기이했다. 설마…? 의아한 시선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그녀의 손에 꼬깃꼬깃한 휴지가 쥐어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어요, 선배님?”선배님, 한동안 뜸했던 호칭이었다. “아니야. 아무 일도 없어.”이정화 과장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일까. 태연한 말씨였으나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나 그만 퇴근할게.” 아예 자리까지 피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여자에게 직감이 있다고 했던가. 비슷한 감정이 들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녀의 옷차림은 분위기와 전혀 달랐다.
그제야 대리들이 침을 삼켜대던 그 야릇한 스타일의 치마가 눈에 들어 왔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불쑥 용기를 냈다.“선배님, 오늘 저하고 한잔 하실래요?”
<전 남편>
“실은 정식으로 사과하고 싶었어요. 지난번 일에 대해서.”다행히 이정화 과장은 나의 제안에 찬성도 거부도 하지 않았다. 반 억지로 그녀와 바(bar)에 들어선 나는 그런 말부터 꺼냈다. “됐어. 다 지난 이야기인걸.”그녀는 씁쓸히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그리고 어차피…, 당신 잘못도 아니고.”확실히 그녀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메뉴판을 주문했다.
“병째 시키죠. 종류는 선배님이 고르세요. 오늘은 제 차례니까.”의외라는 표정이 돌아왔다. 그럼 버번(bourbon)으로 할게-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말했다. 술잔들이 놓여졌다. 이번에는 내가 온더 락(on the rock), 그녀 쪽이 스트레이트였다.“머리는 왜 자르셨어요?”나는 한 달 간의 공백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문득 이정화 과장의 얼굴이 어두워졌다.“그냥.”“하지만 여자가 헤어스타일을 바꾸면 뭔가 있는 거라던데요?”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대꾸 대신 가녀린 한숨소리만이 들려 왔다.
“말씀해 보세요. 전에는 선배님이 제 고민을 들어 주셨잖아요.”나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스트레이트 잔이 비워졌다. 그녀는 물끄러미 내 얼굴을 응시했다. 마치 이 남자에게 고백해도 될까, 라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 같았다.“알고 싶어?”“네.”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재차 긴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당신은…, 내가 왜 이렇게 혼자 양주를 마시게 됐는지 알아?”“아니요.”
“내가 술을 마신 건 이혼하고 나서부터였어. 화가 나고 슬펐지만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지. 그때부터 이런 곳에서 혼자 마시기 시작한 거야.”이혼녀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묘했다. 이정화 과장은 스스로 자신의 이혼담을 털어놓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남편은, 아니 내 전 남편은, 일본에서 만난 같은 유학생이었거든.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곧바로 결혼을 했어. 그런데 그 남자는 일 년쯤 지나자 바람을 피우기 시작하더군. 상대는 유학가기 전 그 남자의 첫사랑이었대.”
그녀가 두 번째 잔을 들이켰다.“실은 엊그제 그 남자가 재혼했어. 그 여자와.”재혼? 순간 나는 멍해진 눈을 껌뻑였다. 세 번째 잔을 들어올리며 그녀는 냉소적인 미소를 머금었다.“당신은 모를 거야. 다른 여자에게 남편을 뺏긴 기분을.”
<위스키>
그녀는 취하고 있었다. 아니 나도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흔한 얘기 따위-이를테면 잊어 버리라고 상투적인 위로를 건넨다던가, 또는 함께 전 남편의 욕을 해댄다던가-는 나누지 않았다. 이정화 과장은 상처받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술이란 그래서 좋았다. 가장 비참한 사람도 가장 잘 웃게 만들어 주니까. 턱을 괸 채 술잔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긴장이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버번을 좋아하는 여자는…, 색(色)을 밝힌대.”“그래요?”“후후, 농담인지 모르겠지만 바텐더들이 그러던걸. 어쩌지? 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위스키가 이거거든.”글쎄다. 정말로 그런지는 증명할 길이 없었다. 만약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나는 그녀를 흘끔거렸다. 허리를 숙이느라 희미한 조명 속에 드러난 그녀의 둥근 허벅지에서 스타킹결이 반짝이고 있었다. 위스키 한 병이 거의 비워졌다. 일어서야 할 시간이었다.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이정화 과장은 그 말에 피식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우리는 그녀의 원룸 아파트까지 함께 택시를 타고 갔다. 그곳에 도착해서도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녀였다.“내가 영광을 베풀까?”“네?”“여기는 내가 석 달 전에 친정에서 독립해 나온 곳이야. 아직 한 번도 남자가 들어온 적이 없었어.”그녀는 앞장 서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가 뒤쫓아오든 말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했다. 4층, 왼쪽에서 세 번째. 그녀가 문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술은 없어. 커피는 있지만.”과연 그런 게 중요했을까. 내 생각에는 그녀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깔끔하게 꾸며진 현관에 들어선 나는 가만히 이혼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정화 과장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돌아섰다.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겹쳤다. 입 안을 더듬기 무섭게 혀가 마주 호응을 해 왔다. 나는 그토록 나를 흥분시키던 곳에 손바닥을 얹었다. 정말로 풍만했다. 그녀의 둔부는 두 손으로 한껏 갈라쥐어도 모자라는 크기였다.
아아, 몸 사이로 손가락을 뻗자 숨결이 터져나왔다. 스커트 뒷자락을 끌어올렸다. 미끌거리는 팬티스타킹의 촉감이 닿아 왔다. 연달아 안쪽까지 손 끝을 밀어넣었다. 얄팍한 속옷 안에 감춰져 있던 한 쌍의 둥근 엉덩이가 맨살 그대로 파르르 흔들리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