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쩍-한 줄기 섬광이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던 형진은 고개를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린 시절 번개를 보고 소리가 들릴 때까지 숫자를 세어 거리를 알아 맞추던 과학 실험을 떠올렸다. 콰르르릉, 천둥 소리가 차츰 가깝게 들려 오고 있었다.
요란한 바깥 풍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술은 밀려드는 하품을 억지로 참아냈다. 긴 하루였다. 새벽 첫차에 일곱 시간이나 시달리고,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한 뒤에 술까지 마셨으니 적잖이 피곤했다. 하지만 내일 서울로 돌아가려면 서둘러 기사의 초고를 마련해둬야 했다. 닥터 최가 마련해 준 병원 기숙사는 꽤 을씨년스러웠다.
삐걱이는 철제 침대와 책상이 전부인 그곳은 몇 년 전까지 환자들의 병실로 쓰였던 방이라고 했다. 혹시 이성귀의 병실은 아니었을까. 씁쓸하게 미소를 지은 형진은 충혈된 눈가를 비비며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탁탁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울려퍼졌다.
‘이성귀의 여성 편력은 한마디로 의문 투성이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만난 지 불과 한두 시간 만에 상대를 침대 속으로 끌어들이는 재주를 지녔다고 한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점은 그런 수법에 넘어간 여자들이 하나같이 양가집 규수들이었다는 것이다.
당대 10대 재벌 중 하나였던 P그룹의 외동딸과 경제부처 장관을 지내던 S씨 집안의 며느리 등, 그가 살을 섞은 여자들은 모두 재색을 겸비한 일류 집안 출신이었다. 전혀 연고가 없던 그가 어떻게 그런 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지 아직도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형진은 담뱃불을 붙였다. 또 한 번 번개가 스치자 허공에 피어오른 연기가 파랗게 빛났다. 그는 다음 문장을 이어 쓰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부장은 마음에 들어하겠지만 그다지 내키지 않는 부분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의 어깨가 으쓱였다.
‘결국 색광증 환자 이성귀는 궁도(宮島)의 정신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기자는 이곳을 취재하던 중 이상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살한 채 발견된 그의 시신에서 기묘하게도 성기 부분만이 유실되었다는 소문이었다. 30여 년 전의 일이기에 현재로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당시엔 그 때문에 외부인에 의한 타살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떠돌았다고 한다. 희대의 간음범이 거세당한 사체로 발견되었다니 실로 아이러니한 사건이다….’
한숨이 새어나왔다. 점점 거세지는 빗소리 너머로 졸음이 밀려들고 있었다.
<#20>
선술집 뒷방의 좁은 창가에도 똑같은 섬광이 번쩍였다. 순간적인 불빛 속에서 작부의 벌거벗은 몸뚱아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벌이고 있는 행위를 믿을 수 없었다. 땀에 젖은 마담의 얼굴은 반복되는 쾌감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입술을 벌린 그녀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몸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가 허리를 들이밀 때마다 번들거리는 젖가슴이 위태롭게 출렁였다.
▲ 그림 최경태 | ||
“그만. 제발 그만…. 나 죽어. 이러다가 정말 죽을 것 같아…!”
그녀는 안타깝게 도리질을 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실제로 당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은 절정에 오른 것 같았다.
더러운 년-그는 희번득이는 시선으로 자신의 하체 아래에 깔려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미 나긋나긋하게 꼬리를 쳐대던 노처녀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욕망을 채운 여자의 기괴한 표정만이 남아 있었다. 추했다. 사악했다. 그것은 벌레의 얼굴이었다. 그에게 끝없는 고통을 안겨 주던 원흉의 얼굴이었다.
“아아…, 여보!”
그녀가 다급하게 그의 둔부를 움켜쥐었다. 드디어 분출이 다가오고 있었다.
“죽고 싶어?”
그가 물었다. 강 마담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죽고 싶을 만큼 궁극의 쾌락에 몸을 떤 것은 찰라에 지나지 않았다. 미처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재빨리 뻗어진 남자의 손이 강 마담의 목을 죄어 오기 시작했다. 격렬했던 정사에 힘이 빠져 버린 여자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벌레를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영원히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고 느꼈다. 꾸르르…. 액체가 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작부의 목구멍 속에서 천천히 살덩이가 튀어나왔다. 그녀의 혀였다. 낄낄낄, 만족에 찬 웃음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21>
그는 아주 어렸다. 그러나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는 아니었다. 빼꼼이 열려진 방문 밖으로 거실이 내다보이고 있었다. 그곳에는 그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소파도 아닌 거실 탁자 아래에 두 사람이 누워 있었다. 그녀는 바닥에 드러누운 채 종아리를 사내의 어깨까지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위에 엎드린 사내는 무릎까지 바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에는 돌돌 말려진 밴드스타킹이 걸쳐져 있었다. 그녀도 풀어헤친 앞가슴 위로 치마를 한껏 걷어올리고 있었다. 그 정도로도 두 남녀의 하반신은 완벽히 드러난 상태였다.
그는 그녀가 벗어던진 하얀 팬티가 거실 저편에 뒹굴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내의 시커먼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허공에 떠오른 그녀의 허연 엉덩이가 마주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탁자에 가려져 그녀는 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파하는 것이라고 짐작한 그는 그녀를 도우려고 했다. 하지만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되는 때문이었다.
그녀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모르는 남자가 집에 찾아올 때마다 그녀는 그에게 절대로 방에서 나오면 안된다고 말했다. 이따금 남자가 바뀌어도 매번 그렇게 다짐을 받았다. 언젠가 단 한 번 그가 잠에서 깨어 바깥으로 나왔을 때에는 매를 맞아야 했었다. 그는 당시에 그녀가 정말로 화가 많이 났었다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때 그녀는 얇은 슬립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심지어 속옷조차도-입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죽는 것보다 끔찍한 노릇이었다. 그가 발가벗겨 내쫓기는 대신 아예 그녀가 사라져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는 소리죽여 울었다. 그녀의 몸은 사내에게 타눌린 채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거꾸로 사내의 몸뚱아리 위에 올랐다.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맙소사, 그는 경악했다. 그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몸뚱아리는 그녀였지만 얼굴은 그의 아내였다.
“헉!”
형진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제기랄…. 눈을 뜨자마자 욕지거리가 내뱉어졌다. 가끔씩 꾸는, 아주 오래 전의 기억과 관련된 악몽이었다. 어째서 아내 미영이 꿈에 나타난 것일까. 그는 뒤통수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궁도 병원의 기숙사 안이었다. 쿵쿵쿵, 방문에서 요란한 노크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 예.” 그가 대꾸하자 벌컥 문이 열렸다.
“일어나셨습니까?” 닥터 최였다. 한데 왠일인지 젊은 의사는 갓 잠을 깬 그보다도 더 황망한 얼굴이었다.
<#22>
“네? 강 마담이요?” 차 안에서 형진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얘깁니까?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다니요?”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핸들을 쥔 닥터 최가 잔뜩 이마살을 찌푸려댔다.
“저도 황당하긴 마찬가집니다.”
“왜 죽은 거지요? 전혀 그럴 여자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글쎄 말입니다. 가 보면 알 수 있겠죠. 저희 병원에서도 사람을 보냈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었다. 천둥 따위는 없었어도 이제는 거센 바람까지 불고 있었다. 바로 어젯밤 그들이 들렀던 선술집에 자동차가 멈췄다. 유리문 앞에는 난감한 표정의 순경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섬 안의 유일한 경찰관인 그가 닥터 최를 향해 목례를 보냈다. 마을 사람 몇몇이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지만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닥터 최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마담이 죽었구만요. 아침에 보니 목을 매달았네요.”
순경은 멋쩍게 뒤통수만 긁적였다. 그는 형진과 의사가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막지 않았다. 유리문을 여는 순간 형진은 와락 풍겨 오는 악취에 코를 감싸쥐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맙소사…!”
술집 안에는 끔찍한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죽은 사람은 강 마담이 틀림없었다. 벌거벗겨진 그녀의 몸뚱아리가 하얀 끈으로 목이 매인 채 주방 위 대들보에 높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어젯밤만 해도 색기가 잔뜩 풍겨나오던 얼굴에서 시퍼런 혀가 흉칙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형진은 당장 욕지기를 느꼈다. 가득 찬 악취는 지린내였다. 바닥에는 종류를 모를 누런 액체가 홍건이 고여 있었다. 시체의 가랑이 사이에서 흘러나온 물이었다. 닥터 최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체는 처음 보시죠?” 형진이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자율신경이 풀려서 이렇게 되는 겁니다. 저도 이런 시체는 오랜만에 보는군요.”
술집 안에는 흰 가운을 두른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닥터 최의 동료 의사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자살한 것 같은데…. 모르겠어.” 가운을 두른 의사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시신을 왜 안치우고 있지?”
“처음 발견한 주민이 112로 신고를 했다더군. 육지에서 다른 경찰들이 도착할 때까지 현장을 보존하기로 했대.”
“육지에서? 이 빗속에 배도 못뜰 텐데?”
“내가 아나. 어쨌든 타살일지도 모르니까 그러지.”
“타살?” 형진과 닥터 최는 떨떠름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여. 무슨 반항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구. 하지만….”
의사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체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작부의 사타구니에 난 거웃을 가리켜 보였다.
“질 안에 뭔가가 남아 있어. 남자의 정액인 것 같아. 이상하지? 정사까지 치른 여자가 자살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상식인데 말이야.”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형진은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닥터 최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자저나 김 기자님도 곤란해지셨는데요?”
“왜요? 저희가 관련되었기 때문인가요?”
“아뇨. 이 비를 보십쇼. 오늘 돌아가셔야 할 텐데, 배가 못뜰 날씨 같네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23>
방파제 위로 시커먼 물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는 가쁜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둑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파도가 등 뒤를 덮치는 데도 아랑곳없이 몸을 웅크린 채 사방을 살폈다. 비바람 탓인지 항구 안에는 돌아다니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경탄하는 시선으로 바다를 돌아보았다. 이제 궁도는 안개에 가려 아예 보이지도 않고 있었다.
낄낄낄-참을 수 없는 웃음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제대로 수영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이 수킬로미터 이상을, 그것도 저 엄청난 풍랑을 뚫고 헤엄을 쳤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놀라웠다. 이게 바로 그가 새롭게 지닌 힘이었다. 수영이든 여자든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이었다.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지만 그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는 마침내 벌레들의 세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