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진은 악몽을 꾸었다. 언젠가처럼 ‘그녀’에 관한 악몽이었다. 아주 오래 전 어느날 밤, 그는 아마도 방바닥 이부자리에서 잠들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애써 잠든 척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침대 위에 벌거벗고 누워 있었다. 정말로 벌거벗었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는 허공에 한껏 치켜든 그녀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희뿌연 맨살 그대로였다고 기억했다.
▲ 그림 최경태 | ||
새 집에는 방이 하나뿐이었다. 그는 기뻐했다. 그와 그녀는 이제 매일 밤 한 방에서 함께 잠을 잘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사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에게는 또 다시 남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전과는 다른 남자였다.
남자는 그가 잠든 사이에 몰래 들어왔다가 날이 밝기 전에 돌아갔다. 적어도 두 사람은 그렇게 믿는 것 같았다.
그날 밤 형진은 자신을 저주했다. 그 밤중에 갑자기 깨어난 자신을 저주했고, 그녀를 돕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했다. 그는 그녀가 사내에게 잡아먹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내는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그녀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가득 거머쥔 채 허겁지겁 고개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마치 맛있는 살코기라도 뜯어먹는 듯했다.
그녀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소리를 질러댔다. 늘 그렇듯 몹시 아파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두 다리를 안타깝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형진의 꼭 감겨진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두려웠다. 부디 그녀가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 있기만을 빌었다. 그러다 그는 울음에 지쳐 잠이 들었다. 눈을 떴을 무렵에는 어느새 아침이 밝아 있었다.
형진은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간밤의 사내 대신 여러 명의 남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그 남자들도 그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자주 만난 적은 없었으나 그녀는 형진더러 그들을 ‘삼촌’이라 부르라고 시켰었다. 그는 그 남자들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찾아올 때마다 형진에게 뭔가를 사다주고는 하면서도 곧 슬그머니 눈살을 찌푸려댔다. 마치 가까우면서도 먼 듯한, 그런 측은해하는 눈빛들이었다.
어쨌든 그 아침은 뭔가가 이상했다. 그녀와 남자들은 마주앉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들 중 누군가가 그를 깨운 것은 틀림없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뭐라 말하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화를 냈다. 그녀는 더 큰 목소리로 화를 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삼촌’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덩달아 일어섰다.
짝,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가 뺨을 감싸며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남자들을 향해 고래고래 욕을 내뱉기 시작했다. 형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그녀와 삼촌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형진은 그녀를 감싸 주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는 팔을 내저으며 애타게 그녀를 불렀다. 엄마-엄마, 라고. 그날 이후 삼촌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67>
“대낮부터 무슨 일이야?”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형사가 투덜거리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경찰서 안은 일요일 오후임에도 평일만큼이나 북적거렸다. 서류철을 뒤적이고 있던 젊은 형사가 대꾸했다.
“폭력 사건입니다. 계장님.”
“폭력 사건?”
“K오피스텔 아시죠? 거기에서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서 난투극이 벌어졌었답니다.”
“그래? 용의자들인가?”
중년 형사는 사무실 안의 사내들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척 보기에도 건달 풍의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들 중 하나는 번들거리는 가죽 점퍼 차림이었다.
“아닙니다, 계장님. 이 사람들은 용의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입니다.”
“응? 피해자?”
젊은 형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네. 지하 주차장 CCTV를 보고 있던 오피스텔 경비원이 신고를 했는데, 저희가 도착했을 때엔 저 친구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원래는 다섯 명이었지만 세 사람은 부상이 심해서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흐음, 늙은 형사의 이마에 주름살이 그어졌다. 그제야 살펴보니 사내들은 각각 얼굴과 팔뚝에 붕대를 두르고 있었다.
“한바탕 구역 다툼이라도 벌였나 보지? 아니면 숨어있던 상대방 애들한테 기습을 당했던가 말이야.”
“글쎄요…. 그게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이걸 좀 보세요.”
형사가 책상 건너편의 비디오 녹화기를 틀었다. TV화면에 어두침침한 공간이 나타났다. 지하 주차장의 폐쇄회로 카메라가 찍은 테이프였다.
“어럽쇼?”
형사계장이 어리둥절한 목소리를 흘렸다. 흐릿한 화면 속에 은색 외제 승용차와 왜소한 몸집의 젊은 남자가 한 사람 등장했다. 그 젊은 남자에게 검은 옷을 입은 사내 다섯 명이 다가서고 있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는 사내들이었다.
잠시 뭐라 두런거리던 그들은 느닷없이 남자를 붙들더니 주먹질이며 발길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한데 그 순간 화면이 지직거리며 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켜졌을 때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동차와 젊은 남자는 어느새 보이지 않았고, 검은 양복의 사내들만이 주차장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몇몇은 상처가 큰 듯 피를 흘리며 엉금엉금 기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전부야?”
“그렇습니다. 묘하게도 폭행이 벌어진 장면만 녹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경비원은 전혀 손을 안댔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 가만 있어 봐, 지금 보면 저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먼저 덤빈 거잖아? 그것도 5 대 1로. 그런데 이 친구들이 피해자야?”
젊은 형사가 한 번 더 어깨를 으쓱거렸다. 중년 형사는 사내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졌다.
“어이, 똑바로 말해. 몇 명이었어?”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형사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머쓱한 시선만 두리번거렸다. 가죽 점퍼의 사내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한 명…, 이었습니다.”
“한 명? 한 사람?”
말도 안된다는 듯 형사계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농담하나? 너희 같은 어깨들 다섯이 한 사람한테 당했다구?”
“네.”
형사들은 떨떠름한 시선을 교환했다. 젊은 형사가 말했다.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 화면 말고 다른 카메라들도 조사해 봤지만 이 녀석들뿐이었습니다.”
중년 형사는 사내들을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양 턱을 긁었다.
“왜 덮쳤는데?”
이번에는 사내들이 망설이는 표정을 주고받았다.
“너희들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잖아. 왜 그랬어?”
가죽 점퍼가 우물거렸다.
“아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았습니다.”
“부탁?”
“부잣집 자식이라 평소에 용돈이나 뜯어내던 사이인데…. 다음 주에 결혼할 예정인 동생입니다. 근데 어젯밤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자기랑 결혼할 여자가 지금 딴 놈이랑 만나는 중이라고 그러더라구요.”
“딴 놈? 방금 전 그 남자?”
“예. 알고 보니 그 아가씨가 친구 집에서 그 놈과 외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찾아가서 손 좀 봐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거꾸로 너희들이 당했다?”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들은 사무실 구석으로 향했다.
“어쩌죠, 계장님? 병원에 있는 나머지 세 친구도 장난이 아닙니다. 한 명은 늑골이 나갔고, 두 명은 다리가 부러졌는데요.”
“이거 원,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아까 화면에 나온 남자는 전혀 저 친구들 상대가 아니었어. 하지만 도리어 저놈들이 나가떨어졌다니….”
“정식으로 고소를 받을까요?”
“그야 저 친구들이 그러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 쌍방 과실인 단순 폭력을 일방적으로 수사할 수도 없으니까.”
늙은 형사는 다시 사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럼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그러자 일순 묘한 일이 일어났다. 사내들은 뭔가에 크게 겁을 집어먹은 표정으로 허둥지둥 서로를 쳐다보았다.
“누군지도 몰라?”
형사계장이 버럭 다그쳐댔다. 한참 후에야 가죽 점퍼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그건….”
“그건?”
“사람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뭐라구? 사람이 아니면 뭐야?”
사내들이 이구동성으로 지껄였다.
“그건 귀신이었습니다. 저희도 그런 건 처음 봤습니다. 정말이에요, 그 인간이 날뛰는 걸 못보셔서 그러십니다. 그건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귀신이었습니다!”
귀신? 두 형사는 재차 멍한 시선을 주고받아야 했다.
<#68>
슬슬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형사계장은 책상에 홀로 앉아 하품을 참아댔다.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결국 고소는커녕 맞아 죽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는 양 황급히 사라져 버렸다. 누구에게 그렇게 됐는지조차 그들은 끝내 밝히지 않았다.
젊은 형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계장님.”
“왜?”
“누가 잠깐 좀 뵙자고 하는데요.”
책상 위에 명함이 내밀어졌다. 중년 형사는 그 조그만 종이쪽을 흘끔거리고는 이내 마뜩치 않은 표정을 찡그렸다.
“국회의원 비서관?”
그가 경찰서 앞의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일어선 상대방이 그에게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혀 왔다.
“어…,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비서관이라는 남자는 마치 훈련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업무 중에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바쁘실 테니 용건부터 말씀드리지요.”
종업원이 다가오자 양복쟁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윗옷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얼굴이 새하얀, 샌님 스타일의 젊은 남자가 찍힌 사진이었다.
“이 사람을 좀 찾아 주십시오. 이름은 오광태, 나이는 스물다섯입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의원님 자제분입니다.”
그랬다. 그는 다름 아닌 국회의원 오현성의 비서관이었다. 형사계장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의원님의 아들이요? 그걸 어째서 저희한테…?”
보좌관이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무래도 가정 문제라 외부로 알려지는 게 조금…. 실은 워낙 두문불출하는 친구라 저희도 찾기가 힘듭니다. 행여 찾아내더라도 매번 허탕이었고요. 그래서 저희 의원님께서는 이번에 확실히 매듭을 짓고 싶어하십니다.”
이를테면 꼼짝 못하게 수갑이라도 채워서 끌고 오라는 거로군, 늙은 형사는 대충 직감했다. 하기야 명색이 경찰이니 별반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양복쟁이와 헤어진 그는 사무실로 돌아와 젊은 형사에게 사진을 건넸다.
“이게 누굽니까?”
“누구긴 누구겠어? 가출중인 높으신 양반 아드님이지. 젠장, 경찰서가 무슨 미아보호소인 줄 아나? 하여간 오늘부터 그 친구 좀 찾아 봐.”
계장은 시큰둥히 푸념해댔다. 그러나 사진을 들여다보던 젊은 형사는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장님, 근데 이 친구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으세요?”
“봤다구? 어디에서 봤는데?”
“이거요. 여기 말입니다.”
그가 비디오 테이프를 가져와 다시 틀었다. 찰라 두 사람은 동시에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은색 스포츠카 옆의 젊은 남자-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에 있던 인물의 얼굴이 국회의원의 아들 오광태와 어렴풋 닮아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