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랄, 김형진은 탁자 위의 술잔을 바라보며 아프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착잡한 그의 심경과는 반대로 유리잔에 담긴 소주는 투명한 빛깔만을 무심히 반짝이고 있었다.
독약을 털어넣듯 그는 단숨에 술을 꿀꺽였다. 아파트 단지 앞의 포장마차였다. 그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벌써 두 번째 소주병을 비우는 중이었다.
엄청난 진실과 맞닥뜨린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 엉클어져 있었다.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달려왔을 때, 황연택 회장은 이미 거실 바닥에 한 움큼이나 시커먼 피를 토한 뒤였다. 그들이 황급히 노인을 데려가는 동안 형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반 시간쯤 지나 장 비서가 돌아왔다. 그는 황 회장의 안부부터 물었다.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장 비서는 어둡게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께서 다소 격해지셨던 모양입니다. 오래 전이기는 해도 워낙 불행했던 기억이신지라….”
형진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장 비서란 중년 사내는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가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회장님은 김 기자님이 언젠가는 이성귀에 관해 물으러 오실 거라고 예상하셨습니다. 아니, 김형진 기자님이 스스로 진실을 밝혀내 주기를 원하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럼 혹시 제가 받았던 서류는…?”
“네. 잡지사로 배달된 서류도 저희 쪽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회장님의 지시였습니다.”
형진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는 다그쳐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어째서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그 일을 파헤치기를 원하셨을까요? 그리고 두 번째 비밀이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그가 정말로 알아야 할 두 번째 비밀-황연택 회장의 그 이야기는 어쩐지 이성귀의 죽음 뒤에 더욱 큰 진실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예감을 던져 주고 있었다. 하지만 장 비서는 묵묵히 눈썹을 찌푸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유감스럽지만 저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회장님께서 직접 이야기하실 겁니다.”
결국 형진으로서는 언제인지 모를 훗날을 기약해야만 했다. 대화가 끝나자 장 비서가 몸을 일으켰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도할 생각이신지요?”
형진은 잠시 머뭇거렸다.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아닙니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부장이 들었다면 군침을 삼키고 달려들었겠지만, 그는 이내 그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아무리 희대의 살인 사건이라 해도 공소시효조차 지난 일이었다. 게다가 황연택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팔순의 고령이었다. 형진은 병상에 있는 노인까지 어쩌고 싶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김 기자님. 그럼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리겠습니다. 오늘 보셨던 회장님의 신상 문제 역시 모르는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회적으로 파장이 생길 수도 있는 문제라서요.”
“알겠습니다.”
형진은 조용히 황연택 회장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그는 포장마차의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빈 잔을 채웠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성귀에 관한 비밀 한 가지가 풀리기는 했으나 그에게는 여전히 커다란 의혹이 남아 있었다. 아니 오히려 한층 더 의혹이 짙어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인 황 회장조차 N호텔에서 촬영된 사진이 이성귀라고 확인해 준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 얼굴은 귀신이란 것일까? 30년 전 죽은 이성귀가 현재에 되살아났다는 말인가?
거세게 머리를 흔든 그는 멍한 시선을 돌렸다. 텅 빈 포장마차 안의 손님이라고는 그 혼자가 전부였다. 이윽고 주홍색 비닐자락이 젖혀지며 두어 명의 남자가 들어섰다. 감색 점퍼를 입은 그 사내들은 멀찌감치 구석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좀처럼 취기가 돌지 않았다. 형진은 그 사진이 황연택마저 착각할 만큼 닮은 사람을 잘못 찍은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설명할 방도가 없었다.
감색 점퍼의 사내들이 묘한 눈초리로 형진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이하게도 안주를 주문해놓고 술은 마시지 않는 모습이었다.
형진은 술값을 치르고 일어섰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 번 더 심각하게 이마를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 박미영은 그 시각까지도 귀가하지 않고 있었다.
<#95>
다음날 아침 김형진은 우울한 표정으로 출근길을 나섰다. 그는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이성귀와 오광태에 관한 의문 때문이었지만 한편으로 아내에 관해 마음이 편치 않은 때문이기도 했다.
미영은 12시가 넘어서야 아파트 현관을 들어서고 있었다. 일이 있었어요, 남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그녀는 단지 그렇게만 말했다. 그리고 몸을 씻고 오자마자 쌀쌀히 등을 돌린 채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미안하다거나 잘 자라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온 것은 마찬가지인지라 형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미영에게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낯설음을 느꼈다. 확실히 짐작하기는 힘들었어도 아내는 뭔가 달라져 있었다.
왜일까, 설마-형진은 고개를 저었다. 정숙한 여교사인 아내와 외도(外道)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보다는 근래 복잡한 사건들에 빠져 자신이 소홀했던 탓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는 몇 주째 미영과 저녁 식탁에 마주앉은 적이 없었다.
형진은 대상 없는 신경질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결국 그의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모든 의혹들을 하루빨리 밝혀내는 것만이 해답이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었다.
버스를 내려 터덜터덜 잡지사 건물로 향하던 형진의 발걸음이 문득 길가의 편의점 앞에서 멈췄다. 새로 인쇄된 그 주(週) 분의 <주간채널>이 가판대에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가 마감이었던가, 형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실에도 똑같은 잡지가 쌓여 있을 테지만 일부러 돈을 내고 한 부를 산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지면들을 뒤적였다. 그가 맡은 탤런트 S양 사건은 당연히 실려 있지 않았다. 대신 동료 기자가 쓴 재벌집 며느리의 섹스 사건만이 큼직한 표제와 함께 가십란 첫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기사에는 사진이 없었다. N호텔에서 찍힌 인물이 누구인지 끝내 밝혀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무도 그 사진이 이성귀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게 뻔했다. 팔꿈치에 잡지를 구겨 넣은 형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는 십여 미터쯤 떨어진 전봇대 너머에서 의아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 감색 점퍼를 입은 젊은 남자였다. 갸웃거리던 그의 시선이 순간 동그레졌다. 왠지 사내의 외모가 눈에 익은 까닭이었다.
묘하게도 그 남자는 바로 어젯밤 집 앞 포장마차에서 마주쳤던 얼굴이었다. 칙칙한 색상의 점퍼와 어색해 보이는 양복 바지, 취중이기는 했어도 형진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술도 없이 안주만 뒤적이던 사내들 중의 한 사람임이 틀림없었다.
사내가 그를 쳐다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형진 또한 자신도 모르게 허둥지둥 시선을 피했다. 옷깃을 세우는 남자의 귓가에 작은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형진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차를 타고 한 시간이나 걸리는 장소에서 똑같은 사내를 두 번이나 목격한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남자는 전혀 바뀌지 않은 옷차림이었다.
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그렇다면 그들은….
▲ 그림 최경태 | ||
“기집애,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이런 곳에 사람을 부르구.”
친구가 호들갑스럽게 묻고 있었다. 박미영은 조용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그냥 하루 휴가를 냈어.”
“휴가? 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마음대로 휴가도 낼 수 있어?”
뜬금없다는 양 친구의 시선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일전 그녀에게 이혼남을 소개시켜 줬던 바로 그 친구였다. 그녀들은 유부녀라는 신분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강남 한복판의 고급스런 카페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에는 미안했어.”
“지난번? 우리 그이 친구 말이야? 됐어,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보다….”
친구는 미영의 옷차림을 열심히 흘끔거렸다.
“그보다 너 웬일이니? 미니스커트에 망사 스타킹이라니, 미영이 넌 원래 그런 옷 잘 안 입었잖아?”
“아까 백화점에서 쇼핑한 김에 갈아입었어. 왜? 보기 싫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미영은 의자에 깊숙이 허리를 파묻은 채 두 다리를 높게 꼬아댔다. 웬만한 처녀들보다도 짤막한 치맛자락이 커피색 그물 스타킹에 감싸인 살결을 거의 엉덩이 근처까지 훤히 내보이고 있었다. 옷차림만 아니라 그녀는 낯설어 보일 만큼 진한 화장까지 하고 있었다. 친구가 민망한 목소리를 중얼거렸다.
“너 조금 변한 것 같다, 얘…. 요새 너희 남편은 어때?”
남편, 김형진-일순 미영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멸시를 가득 담은 듯한 그녀의 반응에 친구마저 뜨끔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요즘도 맨날 야근타령인가 보구나?”
미영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야릇한 눈빛으로 친구의 어깨 너머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친구가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어깨를 찰싹 붙인 한 쌍의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한데 그중 여자 쪽은 그녀들처럼 한국 사람인 듯했지만, 남자는 팔뚝이 무성한 털로 덮힌 커다란 덩치의 백인 사내였다.
꽉 끼는 청바지를 입은 그 외국인은 미영과 비스듬히 마주 보고 있는 자리였다.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껴안다시피 그 백인 사내 곁에 달라붙어 연신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요즘 애들은 외국인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니까.”
친구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미영의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 왔다.
“너, 외국 남자하고 해본 적 있니?”
“외국 남자랑?”
친구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어떨까? 외국 사람 물건이 훨씬 크다던데….”
미영은 의자 아래에 무심히 벌어져 있는 그 백인 남자의 가랑이 사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불룩한 부피의 사타구니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머, 얘도 참!”
망측하다는 듯 친구가 얼굴을 붉혔다. 쇼핑백을 챙겨든 미영이 몸을 일으켰다.
“우리 나가자.”
“나가자구? 어디로?”
“나이트클럽. 오늘은 남자들이랑 놀고 싶어.”
“지, 지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친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미영의 손이 그녀를 억지로 잡아끌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