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황한 김형진은 화들짝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손목시계 안의 날짜 역시 하루가 지나 있었다. 일주일 넘게 잠을 자지 못한 탓에 그는 무려 스물네 시간이 넘게 골아떨어졌던 것이었다.
“이…, 이런 제길!”
머릿속이 캄캄해진 형진은 허둥거리며 옷가지를 주워 입기 시작했다. 자신을 타박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날이었다. 오광태가 나이트클럽에 나타난다는 바로 그날이었다. 더 이상 늦지 않게 잠을 깬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는 바지 자락을 끌어올리기 무섭게 현관으로 뛰쳐 나갔다.
하지만 그때였다. 미끌거리는 뭔가를 밟고 휘청거린 형진은 무심코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얄팍한 갈색 봉투가 놓여 있었다. 지난 밤에는 보지 못했던 물건이었다.
봉투에는 검붉은 글씨로 ‘김형진’이라는 그의 이름이 적혀져 있었다. 누군가가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 현관문 아래로 밀어넣은 것 같았다. 뭐지? 순간 묘한 느낌에 봉투를 연 형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몇 장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한데 기이하게도 그 사진들은 모두 희뿌연 살색으로 가득차 있었다. 여자의 나신(裸身)이었다. 벌거벗은 여자가 침대 위에서 남자와 함께 뒹굴고 있는 장면들이었다. 남자의 모습은 교묘하게 가려져 있었지만, 여자는 마치 포르노 필름같이 몸뚱아리 구석구석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형진은 왠지 사진 속의 여자가 눈에 익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빨리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리고 이내 까무러칠 듯 경악하고 말았다.
시커먼 사내 밑에 깔린 채 헐떡이고 있는 여자의 얼굴이 선명하게 등장하고 있었다. 아내였다. 낯선 남자와 정사를 치르고 있는, 그의 아내 박미영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그는 미영이 지난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텅 빈 아파트 안에는 아무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봉투 속에서 가느다란 끈팬티가 흘러나와 하늘거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갓 치른 정사를 증명하듯 잔뜩 구겨진 그 천조각은 얼마 전 아내의 쇼핑백에 들어 있던 속옷이었다.
형진은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넋을 잃어야 했다. 삐리릭, 삐리리릭…. 거실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흐흐흐…. 낄낄낄낄.”
소름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형진은 그것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오광태, 아니 이성귀가 노리는 다음 희생자는 과연 누구인가-비로소 그 의문이 풀리고 있었다.
“아, 안돼!”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전화기는 그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어느새 뚜뚜거리는 통화음만을 울리고 있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형진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충혈됐다. 아내가 위험했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방에 놓인 은빛 물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형진은 그 반짝이는 물건을 와락 움켜쥐었다.
<#116>
박미영은 쓰러질 듯한 걸음을 간신히 가누며 이마를 짚었다. 영문 모를 두통이 지끈거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녀는 어느 허름한 방의 침대 위에 홀로 누워 있었다. 그녀의 몸은 실오라기 하나없이 벌거벗겨져 있었다. 밤새도록 남자와 섹스를 했다는 느낌이 어렴풋 떠올랐으나 상대가 누구였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기억이 끊어졌다. 재차 정신을 차린 지금 그녀는 어스름이 깔린 거리 한복판에 서 있었다.
미영은 자신이 왜 그곳에 있는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마치 어딘가에서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 같았다. 지나치는 행인들마다 그녀의 야릇한 옷차림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강남 한복판의 어느 번화가인 듯했다.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찰라 나지막한 신음소리를 흘렸다.
“아…!”
가쁜 숨을 몰아쉰 미영은 허벅지를 꼬아댔다. 강렬한 욕구가 갑자기 사타구니를 경련시킨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아무나 붙잡고 애원하고 싶을 만큼 거센 정욕이 일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이 탁한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붉게 젖은 입술이 멍하니 벌어져 갔다.
“네, 가요…. 주인님.”
미영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한 음성을 뇌까렸다. 그녀는 검게 투명해진 시선으로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환락의 천국으로 인도해 줄 듯한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는 커다랗고 화려한 문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쿵쾅거리는 소음과 번쩍이는 불빛 속에서 온갖 벌레들이 현란하게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정장을 차려 입은 사내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보이며 말했다.
“박미영 손님이십니까?”
미영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단지 ‘그분’이라고 지칭할 뿐이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사내를 따라 어두운 복도 너머로 향했다.
<#117>
김형진이 징징거리는 휴대폰 소리를 들은 것은 막 엘리베이터에 올랐을 무렵이었다. 그제야 가까스로 정신이 든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아연하게 바라보았다.
젠장할, 형진은 그 물건을 허겁지겁 허리춤에 쑤셔넣은 뒤 전화기를 꺼냈다. 번호를 확인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부디 그것이 아내이기만을 빌었다.
“여보세요, 김형진 기자님? 저 닥터 최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궁도(宮島) 정신병원의 닥터 최-상대방의 대꾸도 듣지 않고 형진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다, 닥터 최. 알아냈어요! 드디어 알아냈습니다…!”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마구 지껄여댔다.
“마침 잘됐습니다. 그놈이 이성귀였습니다!”
“예에? 그놈이라니요?”
“오광태, 아니 이성귀 말입니다. 이성귀가 아직 살아 있어요! 그놈은 오광태의 몸을 빌려서….”
“김 기자님, 김 기자님!”
닥터 최는 형진의 두서없는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급하게 말을 끊었다.
“잠깐만요, 이성귀든 오광태든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훨씬 더 큰일이 터졌어요!”
1층에 다다른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웬 일인지 수화기 건너의 닥터 최는 오히려 형진보다도 더 초조해하는 음성이었다.
“오늘 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법의학연구소의 친구한테서요. 경찰이 김 기자님에 관해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네? 저와 관련돼서요? 그게 무슨 얘깁니까?”
“김 기자님, 잘 들으십쇼! 국과수(國科搜)와 그쪽 법의학연구소의 유전자 검사가 결국 동일하게 나왔답니다. 그래서 김 기자님께 체포영장이 발부될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체포영장? 형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손바닥 안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러니까 김 기자님, 최대한 빨리 변호사를 구하셔서….”
닥터 최가 안타깝게 외치고 있었다. 형진이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던 두 명의 남자와 맞닥뜨린 것은 그때였다. 그를 보자마자 남자들은 자신들도 놀랐다는 양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형진은 그들이 누구인지 직감할 수 있었다. 언젠가 마주친 적이 있는, 감색 점퍼를 입고 귓가에 이어폰을 끼운 사내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재빨리 품 안을 뒤적이며 말했다.
“김형진씨죠? 저희는 경….”
그 순간이었다. 어이쿠, 소리를 내며 신분증을 꺼내려던 남자가 아파트 계단 아래로 나뒹굴었다. 그를 밀치는 동시에 형진은 다른 사내의 가슴을 어깨로 세게 들이받았다. 그리고 몸을 날려 다짜고짜 반대편을 향해 달아났다.
“이, 이봐! 거기 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불의의 기습에도 남자들은 재빨랐다. 이삼 초도 지나지 않아 형진의 등 뒤에서 요란한 뜀박질 소리가 쫓아오기 시작했다.
형진은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달렸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아내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지금쯤 아내가 어찌되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금세 숨이 턱에 닿아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사내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자 때마침 아파트 단지 앞에서 유턴을 하고 있는 택시 한 대가 눈에 띄었다. 형진은 택시 안으로 뛰어들며 고함을 질렀다.
“N호텔, N호텔로 갑시다!”
어둠 탓에 기사는 미처 감색 점퍼의 사내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택시가 출발했다. 형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형사들과 채 열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그들은 기를 쓰며 뛰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모습들이 작아지더니 이내 따라잡지 못할 만큼 멀어져 갔다. 운전석 등받이를 붙든 채 형진은 다그쳐댔다.
“빨리요, 최대한 빨리!”
▲ 그림 최경태 | ||
정장 차림의 사내가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박미영은 곁에서도 들릴 만큼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그녀의 치맛속 허벅지 사이는 이미 그곳에 들어서기 전부터 끈적하게 젖어 미끌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곳이 나이트클럽의 특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큼직한 가죽 소파와 벽면을 가득 메운 TV 따위로 호화롭게 꾸며진 그 룸 안은 어두컴컴하게 불이 꺼져 있었다. 종업원이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마자 희미한 조명 하나가 켜졌다.
탁자 너머에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조명이라 생각한 것은 촛불이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촛불들이 하나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무슨 제단(祭壇)처럼 테이블 가장자리를 따라 불빛이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미영은 숨을 멈춰야만 했다. 남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상체를 벌거벗은 젊은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며 히죽 입꼬리를 말아올리고 있었다.
찰라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꿈꿔 왔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희번덕이는 사내의 시선은 거친 짐승의 눈빛 그대로였다. 깡마르고 왜소한 그의 몸집조차도 그녀의 눈에는 끝없는 쾌락을 예고하는 야수(野獸)의 몸뚱아리처럼 비쳐지고 있었다.
“내가 너의 주인이다.”
오광태가 말했다. 미영의 떨리는 음성이 그의 말을 반복했다.
“당신이 저의…, 주인님입니다.”
그가 일어섰다. 오광태는 상반신만이 아니라 하체까지 알몸이었다. 미영은 그의 가랑이 사이에 눈길이 박힌 채 꼼짝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내들에게서도 결코 채워지지 못했던, 욕정의 근원이 거대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오광태가 다가오자 그녀는 스스로 그 기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미영의 온몸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 사소한 행위만으로도 그녀는 극상의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었다.
“너는 벌레다. 나의 노예다.”
대답하지 못하는 미영은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스런 웃음을 흘린 오광태는 그녀의 몸뚱아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번쩍 안아 촛불 한가운데에 거칠게 쓰러뜨렸다.
탁자 위에 차려져 있던 양주병 따위가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그는 미영의 미니스커트를 걷어올렸다. 가터벨트와 망사스타킹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하루종일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오광태가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녀의 몸은 그를 맞이할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직후 그가 모든 동작을 한꺼번에 멈췄다. 재미있게 됐다는 듯 오광태는 어깨를 으쓱였다.
“훼방꾼이 나타나셨군, 낄낄낄….”
미영이 불만족의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었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