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하신 이야기가 전부 사실입니까?”
남자가 물었다. 비좁은 공간 안으로 안개처럼 희미한 햇빛이 새어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침묵도 그쳤고, 비도 그쳐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제발 믿어 주세요.”
여자가 침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은 딱딱한 철제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설레설레 머리를 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에게는 왜 그런 정보를 제공하신 거죠?”
“말씀드렸잖아요. 그 남자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날 나이트클럽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얼굴도 본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이해가 잘 안됩니다. 단순히 그 사람을 이용하려 했다는 뜻입니까?”
“자기가 그 사건을 담당하고 있다고 그 사람이 말했어요. 정말이에요. 저는 단지 오빠를…. 오빠를 사랑해서 그랬을 뿐이에요.”
여자는 초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차가운 주변 풍경에 어울리지 않게 진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팔짱을 낀 남자가 나지막히 혀를 찼다.
“그래서 기사가 나면 스캔들이 터지고, 세상에 알려질 테니까 아가씨밖에 남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군요? 그 다음에는 이를 테면, 결혼을 요구하고 말입니다.”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뺨 위로 가느다란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을 따라 화장기가 번져 갔다.
“다시 한 번 묻죠. 그렇다면 아가씨는 사건 장소에 있던 여자가 그 사람의 아내라는 것도 몰랐습니까?”
“네. 몰랐어요. 저는 질투만 했지 그 여자가 유부녀인지 아닌지 전혀 몰랐어요….”
흐흑,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머쓱히 입맛을 다신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좋습니다. 함연주씨.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그녀의 이름은 함연주였다. 형사가 취조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126>
같은 시각, 경찰서의 몇 층 위. 소파들이 늘어선 사무실 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 있었다. 은색 견장을 단 서장(署長)이 차렷 자세로 일어선 채 말했다.
“사건 장소에는 총 다섯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중 두 명은 저희 서(署)의 형사들이었고, 나머지는 희생자들과 용의자였습니다. 용의자가 먼저 흉기를 들고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따라 저희 쪽 형사반원들이 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복 차림의 서장은 바짝 긴장한 시선으로 상석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얼굴에 희끗한 대머리를 빗어 넘긴 남자였다. 그는 설명을 듣는 동안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저희 형사들은 적절한 총기사용 절차를 준수한 것으로 사료됩니다. 공포탄을 발사한 후 흉기를 버릴 것을 명령했지만 용의자는 불응했습니다. 한데 공교롭게도 낙뢰로 인한 정전이 발생했고, 그 틈을 타 용의자가 첫 번째 희생자에게…. 형사들이 제지하기 위해 발사했던 실탄이 그 와중에 여자의 가슴에 맞은 것입니다. 확인 결과 두 번째 희생자는 용의자의 아내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안타깝게도 현장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경찰서장이 송구하다는 듯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상석의 남자가 손을 들어올렸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오, 서장. 나는 그 자리에 있던 년놈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따위는 관심이 없소.”
“죄송합니다. 의원님.”
의원님이라 불린 남자의 목소리는 분노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희생자는 내 아들이었소. 내 아들은 순진한 희생자란 말이오.”
<#127>
“체포영장이 발부돼 있었다니…. 제길, 그럼 우리가 살인범하고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는 거 아냐?”
<주간채널>의 회의실 안은 언제나처럼 뿌연 담배 연기로 가득차 있었다. 이마에 굵은 주름을 그어댄 부장이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렸다. 그의 주위에는 침울한 낯빛의 기자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누군가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꺼냈다.
“하지만 첫 번째 사건은 아직 혐의뿐이라던데요, 부장님.”
“혐의? 혐의 같은 소리 하지 마. 이번에도 이렇게 간단하게 사람을 죽였는데 보고도 모르겠어?”
“그렇다면 대체 사건 전모가 어떻게 된 걸까요?”
“뻔하지 뭘 그래. 미친 놈이었어, 미친 놈. 자네들도 그 친구, 아니 그 새끼가 얼마 전부터 제정신이 아니란 걸 눈치챘었잖아? 그동안 집으로도 전화통화가 안됐다면서? 진작에 마누라가 바람을 피우고 있었던 거야. 몰래 현장을 덮쳤다가 코앞에서 한창 그짓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는 눈깔이 뒤집혔겠지. 그래서 남자 모가지에 칼을 쑤신 거라구. 경찰이 총까지 쐈지만 엉뚱하게 마누라가 죽어 버렸고 말이야.”
기자들은 무거운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벌써부터 여기저기 다른 매체 쪽에서 전화가 걸려 오고 난리가 아닙니다.”
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걱정스러워하는 표정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그는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튕기고 있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우리가 선수를 치는 게 낫겠어.”
“선수를 치다뇨?”
“연쇄살인범, 아니 미치광이 색마 살인범 기사를 뽑자구. 생각해 봐, 특종일지도 몰라. 우리만큼 김형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던 사람들이 어디 있겠어?”
기자들의 시선이 떨떠름히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들을 쳐다보는 부장의 얼굴에 비열한 웃음이 흘러갔다.
“김 기자가 낸 휴직계 있지? 그걸 사직서로 바꿔치기하는 거야. 그래 놓고 우리는 몰랐다고, 우리 잡지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잡아떼면 돼. 어때?”
부장이 신이 난다는 듯 침을 튀겨댔다.
▲ 그림 최경태 | ||
“저는 강 마담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체의 질(膣) 속에서 당신 정액이 나왔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귀신의 짓입니다.”
“귀신의 짓이라고요?”
“미친 소리처럼 들리실 거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사실입니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진정하십쇼. 당신더러 미쳤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귀신이라…. 누구의 귀신이란 겁니까?”
“이성귀, 이성귀의 귀신이었습니다.”
“30년 전에 죽은 사람 말인가요?”
“이성귀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광태를 통해 다신 살아난 거에요.”
“이성귀는 당시에 시체까지 확인됐는데요.”
“몸만 그랬을 뿐입니다. 그 시체에서는 음부가 사라졌었습니다. 이성귀는 자신의 물건을 오광태에게 물려 준 겁니다.”
“결국 몸은 죽었는데 성기만 살아 있었다, 그런 얘기입니까?”
“네.”
“그럼 오광태와 박미영씨의 관계는요?”
“그것도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건 오광태가 아니라 이성귀였어요.”
“아,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이성귀와 박미영씨가 어떻게 됐다는 뜻입니까?”
“이성귀는 자신의 씨앗을 퍼뜨리려고 했습니다.”
“자손을 원해서 박미영씨와 정사를 벌였다는 건가요? 어째서죠?”
“그, 그것은….”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제 아내…. 제 아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저는 이성귀의 아들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구요! 제 아내는 그 사람의 며느리라서 그렇게 됐습니다!”
으허헝-김형진은 수갑이 채워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형사들은 그의 오열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취조실 바깥에서는 두 명의 남자가 작은 창을 통해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형사계장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 말로는 안 미쳤다고 하는데, 도통 헛소리로만 들리는군요. 그러니까 대를 잇기 위해 귀신이 나타났다는 건가요, 의사 선생님?”
곁에 서 있던 닥터 최가 얼굴을 찡그렸다.
“제 소견으로는 동일시 현상 같습니다.”
“동일시 현상이요?”
“예. 본인이 아닌 아들이라고 믿는 게 특이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 인물에 집착한 나머지 그 인물과 자신이 같은 사람이라고 믿게 되는 증상입니다. 정신질환의 일종이죠.”
“흐음…. 이해가 갑니다. 이성귀란 인물을 취재하면서 그렇게 됐겠군요.”
“실제로 김형진씨는 궁도(宮島)에서 저를 만났을 때에도 기시감(旣視感)을 느낀다고 했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닥터 최는 취조실 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법정에서 김형진씨의 정신이상을 증언하기로 했습니다. 강 마담을 살해한 것도 그런 이성귀의 행각을 좇은 게 분명합니다. 색광증(色狂症)에서 비롯됐겠죠. 의사인 저조차도 믿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색광증이라, 아이러니네요. 정말로 이성귀와 같은 점이 있기는 있었으니 말입니다.”
형사계장은 씁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29>
2주 후, 국제선 공항의 한산한 1등석 승객 전용 라운지-함연주는 바(bar)에 앉아 높다랗게 다리를 꼬아올렸다.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다가왔다.
“위스키, 온더락으로 주세요.”
함연주는 짙은 색 선글래스 너머로 주위를 흘끔거렸다. 그녀의 발 밑에는 큼직한 여행가방이 놓여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저 지금 도착했어요.”
그녀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잘했어. 한 1년쯤 놀다 온다고 생각해라. 그때쯤이면 그 사건도 잠잠해질 게야. 알겠지?”
“네, 아빠.”
함연주는 전화를 끊으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아빠, 대형 종합병원의 원장이면서도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직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 술 말고 오렌지 쥬스로 바꿔 주세요.”
뭔가 시큼한 것을 마셔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1년이면 충분한 시간이었다. 아니 아홉 달 뒤면 모든 게 달라질 예정이었고, 그동안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라운지 창 밖으로는 방금 도착한 비행기가 천천히 트랩을 대고 있었다. 한 쌍의 신혼부부가 그 비행기의 1등석 안에 앉아 있었다. 안경잡이 남자가 여자에게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을 거야.”
여자는 대답 대신 묘한 미소만을 머금었다.
“틀림없이 그랬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경미 니 생각엔 어때?”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오빠.”
양경미는 눈치채이지 않게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그녀는 이미 그곳에 다른 씨앗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오피스텔 주차장 기둥 뒤에 숨어 있어야 했던 날 따위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제 곧 그는 자신이 그 씨앗의 아버지라고 믿게 될 터였다.
<#130>
“나는 못 믿겠더라.”
너스 센터에 앉아 있던 여자 간호사가 동료에게 말했다.
“4호실 환자 말이야. 연쇄살인범이라고 경찰까지 지키고 있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던걸.”
“그래? 나도 어쩐지 그런 느낌이기는 해. 게다가 색광증 환자라니…. 정말일까?”
“후훗, 그래서 얘긴데 말이야. 내가 재미있는 거 가르쳐 줄까?”
“재미있는 거?”
“그 4호실 환자, 그 남자 물건 본 적 있어?”
“어머, 얘도. 망측하게.”
조숙해 보이는 외모의 간호사가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얼굴은 은근히 호기심이 어린 표정이었다.
“그럼 너는 봤다는 거야?”
“응. 어제 구속복 갈아 입히느라 들어갔었거든. 그런데….”
“그런데? 어때서 그래?”
동료 간호사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꼴깍였다.
“세상에 글쎄…. 태어나서 그렇게 큰 물건은 처음 봤어. 거의 내 팔뚝만했어.”
“에이, 정말?”
“진짜야. 거짓말 아니라니까. 핏, 너도 보고 싶어하는구나?”
두 여자는 잠시 야릇한 상상을 하며 키들거렸다. 그때였다. 복도 너머에서 아련히 비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녀들은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남자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젠장, 4호실이야. 그 남자가 메스를 훔쳐다가 자기 물건을 잘랐대!”
누군가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자 간호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낄낄낄낄-어디선가 기괴한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듯했다.
<제8화 색귀(色鬼)-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