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조롭고, 기계적이며, 심지어 보컬마저도 신디사이저(synthesizer)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음색-Depeche Mode나 Human League 따위가 유행한 것은 이미 80년대부터였으나 그 무렵만 해도 테크노 팝을 듣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아니 나 이외에 그들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 것조차 은정이가 처음이었다.
그 바(bar)는 전체적으로 어두웠다. 그래서 암울한 곡조가 한층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그런 장소에서 그들의 음악을 듣게 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효미는 묘한 끈으로 은정이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음악….”
나는 메뉴판을 내미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 사장님이 가끔 트시는 음악이에요. 곡명은 저도 잘 모르지만요.”
“Depeche Mode예요.”
“네?”
나는 멋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효미의 얼굴이 꽤 어려 보인 때문이었다.
“와일드 터키, 온더락으로 주세요.”
일요일이라 그런지 커다란 바 안에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한두 명의 남자가 맞은편 끝쪽에 나란히 앉아 있었고, 종업원도 그녀와 다른 아가씨 한 명뿐이었다.
그녀가 술을 가져왔다. 나는 이내 그 술집이 조금 색다른 스타일임을 알아차렸다. 불경기 탓에 나온 새로운 영업방식인 양 그곳의 바텐더들은 손님과 마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제야 보니 두 아가씨 모두 보통 이상의 외모였다.
혼자 마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의향을 물었다.
“내가 한 잔 살까요?”
효미는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맥주라면 마실게요.”
위스키잔 곁에 투명한 맥주병이 놓여졌다. 나는 그 바가 마음에 들었다. 여자 치마 속이나 더듬기 위해 애꿎은 안주값이나 팁을 날릴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러려면 아예 룸카페나 방석집을 찾았을 터였다.
무엇보다 나는 컴퓨터 아닌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녀도 굳이 매상을 올리려는 인상은 아니었다.
은정이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을까.
아마도 1년은 넘었을 것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나는 친구녀석의 결혼식에서 그녀를 마주쳤었다.
은정이는 베이지색 치마 정장을 차려 입은 채 예식장 뒤켠의 여자 동기들 틈에 섞여 있었다. 아주 잠깐 눈길이 마주친 순간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보내는 것으로 나에게 인사를 대신했다.
나는 그날따라 그녀가 유달리 진한 화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뭔가를 애써 감추려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이 뽀얗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못했다. 예식이 끝난 후 모인 피로연에도 은정이는 참석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아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제야 나는 그녀가 이미 남의 여자이며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은 신입생 시절부터였다. 같은 과, 같은 학번, 같은 동아리까지. 은정이는 차분한 성격과 날씬한 몸매 덕분에 학교 안에서 인기가 많았다. 반면 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였다. 당시에도 여전히 정치와 시위가 이슈였지만 나는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공부와 학점에 매달리는 모범생도 아니었다. 간신히 F학점을 면하던 나의 관심은 오직 음악과, 영화와, 술뿐이었다.
그런 내가 과 내의 창작 동아리에 가입한 것은 다소 희한한 일이었다. 학기 중반의 어느 날 학생회실에서 K선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태영이 너, 우리 소모임에 나와라.”
K선배는 커다란 덩치와 달리 두꺼운 안경을 쓴, 어딘지 학구파처럼 보이면서도 우락부락한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딱히 친한 사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어때? 내가 보기엔 너 이런 쪽에 꽤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제가요…?”
생각해 보면 나보다도 그가 더 내 성격을 잘 파악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반쯤은 얼결에 그들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신입생 가운데 그 모임에 들어간 것은 모두 셋이었다. 남자는 J와 나, 유일한 여학생이 바로 은정이었다.
그 즈음 우리 또래 여자애들의 대부분은 동갑내기를 사귀고 있었다. 불과 두어 살만 많더라도 늙은이-몇 년 뒤 그녀들의 남편은 오히려 더 나이가 많기 일쑤였지만-라며 호들갑이었다. 그녀들은 미팅이나 소개팅으로 다른 학교 학생을 만났고 이따금씩 캠퍼스 커플을 이루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어째서 은정이가 잘생겼고 잘 놀던 J가 아닌 나를 택했는지 의아할 때가 있다. 어쨌든 K선배를 포함한 우리는 학교 안팎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함께 술을 마셨고, 함께 영화를 보러 다녔고, 같은 소설을 읽었다.
나는 은정이를 처음부터 무작정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있어 조금은 오르기 힘든 나무였다. 그녀를 짝사랑하는 동기만도 여럿이었다.
그러나 갓 20대의 나이란 외모나 조건보다도 반항과 독특함이 눈길을 끄는 시절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명품은 찢어진 청바지를 쫓아오지 못했고 하이힐은 낡은 농구화를 따라오지 못했다.
은정이 역시 나를 그렇게 여긴 듯했다. 1학기가 끝나가던 초여름에 그녀와 나는 단 둘이 학교 앞 카페에 앉아 있었다. 칸막이마다 커튼이 쳐져 있는 전형적인 90년대 풍의 그곳에서 그녀는 파르페를 먹고 있었다.
“뭘?”
은정이는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웨이브진 긴 머리카락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까맣게 반짝이고 있었다.
“차은정 너와…. 내 사이.”
내 목소리는 침착했다. 의외로.
“우리 사이? 우리는 친구잖아?”
“알아. 하지만 나는 니가 그냥 친구가 아니라 여자친구였으면 좋겠어.”
“그냥 친구랑 여자친구랑 뭐가 다른데?”
“그건 나도 모르겠어.”
실제로 나는 알 수 없었다. 대학교에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사귄 적이 없는 탓이었다.
우리는 한동안 침묵했다. 은정이는 승낙도 거절도 하지 않았다.
“소문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약속할 수 있어?”
그날 밤 나는 그녀의 집 앞에서 첫 키스를 경험했다.
“이름을 물어 봐도 될까요?”
그녀가 두 번째 잔에 술을 따랐다.
“효미예요, 신효미.”
앳된 인상과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건너편에서 칵테일 주문이 들어오자 그녀는 셰이커(shaker)를 들고 흔들기 시작했다.
“효미씨는 아르바이트생인가 보군요.”
“어떻게 아셨어요?”
“칵테일 만드는 솜씨가 익숙해 보이지 않아서요.”
그녀가 아르바이트생이란 걸 알아내기는 쉬웠다. 홀로 바를 돌아다니며 술을 마시는 버릇 덕에 이런 동네 술집에 정식 바텐더가 있을 리 없다는 사실쯤은 익숙했다.
자신이 서툴다는 얘기를 들은 셈인데도 효미는 그리 개의치 않는 듯했다.
“후훗, 맞아요. 실은 공부하는 동안만 잠시 일하는 거예요.”
“학생인가요?”
“아뇨. 학교는 졸업했고, 뭘 좀 준비하는 중이라서요.”
“준비라…. 입사시험?”
“그런 건 아니구요. 뭐랄까, 꿈 같은 거죠.”
꿈. 그녀가 말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무슨 꿈이죠?”
두 번째 잔을 비우자 그녀의 맥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눈짓으로 그녀에게 한 병을 더 권했다.
“어떤 꿈인지 얘기해 줄 수 있어요?”
“실은 제가 문예창작과를 나왔거든요. 그래서 글을 쓰는 게 목표예요.”
효미가 대답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키들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떠름히 나를 응시했다.
“미안해요, 갑자기 웃어서.”
“제 꿈이 허황된 거라 그러세요?”
“글쎄요. 그런 건 아니지만….”
입꼬리를 말아올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글을 쓰고 싶으신데요?”
“소설이요.”
내 얼굴은 한 번 더 쓴 미소를 지어야 했다. 효미는 여전히 미심쩍다는 시선이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비웃는 건 아니에요.”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효미씨는 나랑 직업이 비슷하네요.”
“어머, 혹시 작가세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왠지 처량해진 느낌이었다.
그제야 효미는 표정을 풀고 있었다.
“여기에서 작가 분을 만난 건 처음이에요.”
“저도 그래요. 워낙 희귀한 직업이니까.”
그녀는 그런 곳에서 작가를 만났다는 게 신기한 모양이었다. 나 역시도 그런 곳에서 작가 지망생을 알게 될 줄은 몰랐었다.
“그럼 등단도 하셨어요?”
“네. 몇 년 전에.”
“어디로요?”
내가 잡지 이름을 대자 효미는 감탄하듯 되물었다.
“무슨 글을 쓰세요?”
그 질문은 대답하기 힘들었다. 세 번째 잔을 주문하고 나서야 나는 천천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지금은…, 포르노 소설이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