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또박거리는 발걸음 사이로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나 때문에…, 힘들지?”
“뭐가?”
“참는 것 말이야.”
참는 것, 나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제껏 서로에게 진한 페팅(petting)만을 허용했을 뿐 실제 섹스는 경험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끔은 아슬아슬한 지경까지 넘나들었지만 은정이가 한사코 거부한 때문이었다. 그 또래 사내녀석들이 누구나 그렇듯, 그럴 때마다 몸이 달았던 나는 종종 그 문제로 그녀와 다투거나 서먹해지고는 했었다.
“아니, 안 그래.”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당시는 러브호텔이 넘쳐나지도 않았고 비디오방이나 노래방-최소한 여관보다는 손쉽게 남들의 눈을 피해 육체적 접촉을 이룰 수 있는-이 유행하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래서 갓 스물을 넘긴 연인들이 첫경험을 치르는 계기란 대부분 함께 떠나는 여행이었다. 바로 그 며칠 전 은정이는 나의 주말여행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집 앞이었다. 그녀가 멈춰서며 혼잣말을 하듯 속삭였다.
“오늘 우리 집에 아무도 없어.”
나는 은정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엄마 아빠는 시골에 내려가셨고, 동생은 학교에서 수학여행 갔어.”
그녀는 나더러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비밀의 문처럼 대문이 열렸고, 우리 두 사람은 담벼락 위를 걷는 한 쌍의 고양이처럼 살그머니 안으로 들어섰다.
은정이가 자신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녀가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나는 그녀를 붙들고 키스를 시작했다. 어색하게 찻잔 따위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텅 빈 집에 단 둘이 있다는 사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이 나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 ▲ 그림 최경태 | ||
은정이의 입술이 벌어졌다. 떨리는 내 손길은 그녀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마지막 한 겹의 얄팍한 천조각 속으로 향했다. 따뜻하고 미끌거리는 감촉이 닿아 왔다. 나는 침대 쪽을 돌아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아?”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대답으로 모든 것을 허락했다. 무릎을 꿇은 나는 그녀의 스커트를 끌어내렸다. 내가 속옷 가장자리를 젖히자 은정이는 침대에 가로누우며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이윽고 조용히 엉덩이를 들어 내 몸짓을 도왔다.
우리는 서툴렀다. 은정이의 남은 옷가지들을 벗겨 낸 나는 바지춤조차 제대로 끄르지 못한 채 그녀에게 몸을 포갰다. 그녀는 가녀린 숨소리를 흘리며 두 눈을 꼭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 역시 충분히 나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은정이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기 싫다는 양 내가 움직이는 내내 양 팔로 가득 내 등을 끌어안고 있었다. 짧고 어설픈 정사의 끝자락에서 나는 똑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괜찮니?”
그녀의 몸 속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들어서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고작 한번의 정사를 걱정할 만큼 나는 순진했다. 물론 은정이는 나 정도로 바보스럽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가 몸을 일으키고 나서도 한동안 가만히 드러누워 있었다.
“태영아, 나…, 처녀가 아니야. 알고 있지?”
나는 대꾸할 수 없었다. 전혀 몰랐던 탓이었다.
“고등학교 때 과외 선생님을 좋아한 적이 있었어. 그때 나는 그 선생님을….”
은정이는 내가 서운해하거나 화를 내리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차라리 그녀가 그런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기를 바랐었다. 세상의 어떤 것들은 알고 있어서 더 나쁜 것도 있으므로.
“걱정하지 마. 나는 이해해.”
그게 내 대답의 전부였다.
-○○번 방에서 ‘그녀’님이 대화에 초대하셨습니다. 비밀번호는 ×××입니다.
-‘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나> 안녕하세요.
그녀> 어서 오세요. 오늘도 또 만나네요.
밤 늦은 시간의 만남에 차츰 익숙해진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비밀대화방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어느 채팅 사이트든 인원을 두 사람으로 제한시켜 놓을 수는 있었지만, 한쪽이 갑자기 자리를 비우거나 본의 아니게 접속이 끊길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 사이에 제삼자, 특히 남자가 들어오거나 한다면 우리는 잠자코 그 사람이 나가기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아예 방을 옮겨야만 했다. ‘그녀’는 적어도 나와 함께 있을 때에는 다른 이와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듯했다.
나> 오늘은 술 한잔 하셨나 보군요.
그녀> 어떻게 아셨어요?
나> 말투가 쾌활하게 들려서요.
그녀> 실은 사무실에서 회식이 있었어요. 재밌네요, 꼭 옆에서 제 얼굴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아요.
그 말은 거의 사실이었다. 서로에게 친숙해질수록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점점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 그나저나 지난번엔 너무 늦어서 그만뒀는데….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나> 뭔데요?
그녀> ‘나’님은 어떠세요?
나> …?
그녀> 외롭지 않냐는 뜻이에요. ‘나’님은 아직 혼자시잖아요. 아닌가요?
그녀도 나처럼 호기심이 생겼다는 뜻일까. 나는 머쓱히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나> 맞아요. 혼자죠.
그녀> 애인은 없으세요? 아님 여자친구라도.
내 시선은 슬그머니 문가를 흘끔거렸다. 자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건넌방에는 효미가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이 시간쯤이면 나의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좀처럼 방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거짓말을 택했다.
나>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 왜요? 눈이 높으셔서 마음에 드는 분이 없는 건가요?
나> 전혀요. 예전에는 있었어요. 아주 예전에는.
그녀> 아주 예전이라면 꽤 오래되셨나 봐요?
나> 글쎄요. 한 몇 년쯤?
그녀> 어머, 굉장히 오래네요.
나> 그런 편이죠.
그녀> 음…. 혹시 누구를 못 잊어서 그러세요?
모니터를 쳐다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찔끔거렸다. 은정이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 어쨌든 ‘나’님도 저와 동갑이시니까, 여자친구가 필요하실 것 같은데.
나> 모르겠어요. 별로 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녀> 하지만 남자들은….
그녀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녀> 남자들은 참기 힘들 때가 있잖아요?
나> 참기 힘들 때요?
그녀> 그러니까…, 욕구 말이에요.
내가 대답을 머뭇거리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그녀> 후후, 솔직하게 얘기하셔도 돼요. 저는 이해해요.
나> 사실 가끔 그렇기도 해요.
그녀> 있잖아요, ‘나’님.
나> 네.
그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요. 그럴 때 ‘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세요? 이상한 데에 가시나요?
나> 이상한 데요?
그녀> 그런 곳 많잖아요. 588도 있고, 안마시술소나 증기탕도 있고.
당황스러웠다. 나는 그녀가 아이까지 낳은 유부녀임을 새삼 상기했다.
나> 아니요. 저는 그런 곳은 안 가요.
그녀> 그렇다면 혼자 해결하시는 거에요?
나> 혼자요?
그녀> 네. 이를테면 자위행위라든가…. 제 질문이 조금 그런가요?
나> 어….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그쯤에서 그녀가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비밀대화방이란 환경이 그녀를 대담해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니 술기운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지도 몰랐다.
그녀> 그럴 때에 남자들은 보통 무슨 상상을 할까요? 포르노를 보나요? 얘기 들으니까 남자들은 그런다던데.
나>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녀> ‘나’님은요? ‘나’님도 그러세요?
나는 순간적으로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나> 저는….
그녀> 만약 포르노가 아니라면, 옛날 여자랑 섹스한 기억을 떠올리나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다시 한번 은정이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 얘기…. 재미없죠?”
은정이에 관한 이야기를 마친 나는 머쓱히 입술을 깨물었다.
“아뇨, 재미있어요. 정말로.”
효미는 여전히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녀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근데 제 생각에는 아직도 그분을 못 잊으신 것 같아요.”
“내가요?”
“네.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요.”
과연 그럴까. 나는 부정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주위에는 더 이상 손님들이 남아 있지 않았다. 새벽 2시-바(bar)가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효미가 입구 쪽을 흘끔거리며 말했다.
“술 많이 취하셨어요?”
“많이는 아니에요. 왜요?”
확실히 나보다는 그녀의 귀 밑이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그녀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그럼 저 더 마시고 싶어요. 밖에 나가서 소주 한잔 사 주실래요?”
효미와 나의 첫 번째 데이트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